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은균 Mar 30. 2020

나는 나무 친구가 있다

1


얼마 전 상속 등기를 뒤늦게 마쳤다. 9년 전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 곧장 하려다 미룬 일을 작년 가을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 부랴부랴 해치웠다.


지난 2월부터 3월 초 사이에 허름한 고향 집과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평생 일구고 가꾼 논밭 몇 필지의 소유권을 내 앞으로 돌리는 일을 하려고 몇백 킬로미터를 다녔다. 일곱이나 되는 형제자매들의 기본 서류 몇 종을 챙기고, 돌아가신 부모님과 관련된 상속 등기 서류들을 모아 하나로 철하니 두툼한 책자 한 권 분량이 되었다.


2


지은 지 30년이 넘은 집은 이미 퇴락해 볼품이 형편없다. 김 매는 손길과 쟁기질이 멈춘 논과 밭은 풀밭 수풀이 된 지 오래다. 그런 땅이나마 수만 수천 평이라도 된다면 땅 욕심을 낼 만한데,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남긴 논밭은 말 그대로 손바닥만하다. 상속 서류를 챙긴다며 애면글면하는 내게 누나들 몇은 “손바닥만한 땅뙈기 그냥 내버려 둬라”며 짠해 하셨다.


등기를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둔다고 집과 땅이 어디로 가지는 않는다. 형제들 서류를 챙기고, 상속분할협의서에 인감도장을 받으러 다니며 든 시간과 돈을 생각하면 법무사에 몇십만 원 주고 맡기는 게 더 이문이 남을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직접 발품을 팔고 다닌 건 아버지와 어머니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은 집과 땅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그들을 자식인 내 품 안에서 편안히 모셔 안고 지내고 싶은 바람 때문이었다.


3


나는 어렸을 때 우리 집에 과일 나무가 많기를 바랐다. 살구나무와 감나무 몇 그루가 대문 바자울 곁과 뒤안 담벼락과 앞마당 가에 서 있긴 했다. 그것들은 너무나 평범해, 나는 자주 흘긴 눈으로 녀석들을 보곤 했다. 내가 원한 것은 앵두며 살구 같은 ‘고급진’ 과일 나무였다. 다른 집에는 그놈들이 한두 그루씩 있었지만 우리 집에는 집과 밭 어디에도 단 한 그루도 없었다.


초등학교 3학년인가 4학년 때였다. 학교에 울력을 갔다 오신(40여년 전 시골 학교에서는 학부모들이 학교 일을 하기 위해 ‘호출’되는 일이 적지 않았다.) 아버지 손에 나무 한 그루가 들려 있었다. 학교 담장 구실을 하는 둑방을 보수하는 일을 하다가 얻으셨다고 했다. 나는 환호성을 지르며 집 뒤꼍 입구 치자나무 옆에 앵두나무를 심었다.


4


40살 정도 된 앵두나무는 10척 장신에 천하장사 씨름꾼의 허벅지만한 밑둥치를 자랑하는 헌걸찬 장정이 되어 있다. 심은 지 몇 년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 빼어난 과실 맛과 모양으로 동네 또래들에게 시샘의 주인공이 되었던 녀석은 이제 아버지와 어머니가 떠난 고향 빈 집을 홀로 지킨다.


봄이 오면 꽃순을 만들어 피워 내고, 수천 수만 마리의 꿀벌들을 불러 모은다. 5월이면 빛나는 새빨간 앵두 열매로 아름다운 자태와 위용을 뽐낸다. 꽃 피고 열매 맺는 시절에 맞춰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묵묵히 서서 고향 집을 지킨다. 그를 귀한 벗으로 여기는 나는, 그 덕분에 여전히 예전 집이 내게 전해 준 기분을 그대로 느낀다.


5


지난 주말에는 작년 겨울 두 다랑이를 한 다랑이로 합토해 만든 문전답에 자두나무와 매화나무와 감나무를 심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각자 좋아하는 나무 한 그루씩을 잘 보살피고 키우라고 일러 주었다. 큰 녀석과 막내는 자두나무에, 둘째는 감나무에 눈길을 주었다.


다시 고향 동네에 가면 아이들 이름을 새긴 이름표를 나무들 목에 걸어 줄까 생각 중이다. 뒤꼍 앵두나무가 내 친구가 된 것처럼, 그놈들도 우리 자식들에게 평생 가는 벗이 되었으면 좋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