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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 재료를 제조할 때 사용되는 ‘비스페놀 A’라는 화학물질이 있다. 비스페놀 A의 분자는 사람 뇌에 들어 있는 에스트로겐 수용체에 영향을 미쳐서 남자 태아의 뇌를 여성화할 수 있다. 임신한 어미 쥐에게 여러 날에 걸쳐 비스페놀 A를 다양한 용량으로 투여하면 그 새끼가 여러 가지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인다. 암컷 쥐의 난소가 될 세포 속 유전자가 소량의 비스페놀 A에 노출되고 난 다음에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바뀌기도 한다.
현재 전체 미국인의 90퍼센트 이상이 소변에서 비스페놀 A가 검출된다고 한다. 비스페놀 A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서도 똑같은 비율로 검출되었다고 해 보자. 그런데 정부출연 연구기관 소속의 화학자들과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는 비스페놀 A의 유해성에 대해 확실하고 공통적인 결론을 내지 못한 상태다. 독성이 입증되었지만 제때 금지가 이루어지지 않은 화학물질의 사례도 몇 건 있다.
이제 당신이 국회에서 비스페놀 A가 검출되는 플라스틱 제품 규제를 골자로 하는 법안을 심사하는 국회의원이라고 가정하고, 이 법안을 최종적으로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결정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당신은 어떤 결론을 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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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심리학자 제롬 케이건은 《무엇이 인간을 만드는가》에서 법적 조치가 이루어지기 위한 조건들을 언급하면서 비스페놀 A의 사례를 든다. 케이건은 이렇게 말한다. 사실만으로는 부족하고, 거기에 대중의 정서가 보태져야 법적 행동이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보자. 케이건에 따르면 간접흡연의 위험을 말해 주는 증거가 비스페놀 A의 유해성을 말해 주는 증거보다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런데 간접흡연의 위험성에 대한 대중의 우려가 커지자 정부에서는 건물 내부 흡연 금지나 공공장소 금연 정책을 도입했다. 증거만으로 충분하지 않을 때 대중의 강력한 태도나 정서가 합쳐지면서 사회 구성원들이 행동에 나설 설득력 있는 이유로 받아들일 만한 신념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케이건이 비스페놀 A와 간접흡연의 사례를 통해 전하려고 한 요점의 전제는 사실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쯤이겠다. 나는 이들 사례를 보면서 조금 다른 측면을 떠올렸다. 우리는 어떤 사실들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도 이런저런 결정을 내리며, 결정을 내린 후에는 그 전에 미처 예상하지 못한 문제를 만나 난관에 빠지기도 한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개인이나 정부가 내리는 결정이 사실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예상하지 못하고, 의도하지 않은) 결과에 대해 누가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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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나 정부가 명백한 사실 외에 대중의 정서까지를 고려한 바탕 위에서 결정을 내리는 일이 바람직하게 보일 수 있다. 대중의 정서를 살핀다는 것은 어찌 보면 민주적인 협치를 가능하게 하는 참여와 소통 시스템의 핵심일 것 같다. 문제는 그와 같은 대중의 정서라는 게 실체가 모호한 요령부득의 언어일 때가 많다는 점이다.
대중의 기준과 범위를 어떻게 잡을 것인지, 사실과 의견(대중의 정서)을 고려하는 정도가 모든 정책 결정 과정에 단일하게 적용되는 것인지 등의 문제까지를 생각하면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대중의 정서에 정책 결정권을 갖는 권력자들이나 정부기관들이 자신들의 삿된 의도를 결합시키면 최악의 포퓰리즘(포퓰리즘 자체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이 펼쳐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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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는 지난 몇 달간 이어진 코로나 19 사태의 몇몇 국면에서 초‧중‧고교의 (온라인, 등교) 개학 시기를 결정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여론을 수렴하는 작업을 벌였다. 나는 그런 교육부의 의사결정 방식이 이상하게 보였다. 방역당국이, 높은 치명률과 감염 전파력으로 사람들에게 공포를 안겨 주는 전대미문의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는 마당에 사람들의 생각(의견, 정서)에 기대 개학 시기를 결정한다는 게 과연 온당할까. 사람들 대부분이 등교 개학의 결정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것이 명확히 충족되었는지 여부를 확인하거나 판단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개학 시기 결정 문제를 객관적으로 검토할 수 있을까.
등교 개학 문제가 이슈가 되었던 4월말경 언론 보도들을 일별해 보면 감염병 전문가들이 등교 개학에 부정적인 시선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생명 문제를 최일선에서 다루는 사람들이므로 등교 개학에 대한 판단의 잣대를 보수적으로 적용한 결과가 그렇게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도 등교 개학 문제가 코로나 이슈의 최전방에 서게 된 것은 중‧고교 3학년생들의 상급학교 진학 문제라는 “현실적인 문제”(김강립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제1총괄조정관 같은 정부 고위당국자들이 쓴 표현이다.)를 좀 더 우선시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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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보다 더 “현실적인 문제”가 어디 있느냐고 말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예를 들어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비정규직노동자나 가게가 부도가 난 영세자영업자, 소득이 멈춘 특수고용직 종사자들이 떠안고 있는 것보다 더 절박하게 “현실적인 문제”가 있을까. 그들은 생존의 절벽을 힘겹게 기어오르고 있다. 5월 4일 교육부가 등교 개학 시기와 일정을 발표할 때, 나는 고 3과 중 3 학생들을 등교 개학의 맨 앞자리에 놓은 교육당국자들에게 묻고 싶었다. ‘학생들 입시가 중합니까, 목숨이 중합니까.’
방역당국이 전염병에 관한 모든 정보(사실)를 속속들이 꿰뚫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전염병 전문가들의 판단이 항상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도 무리다. 그러나 적어도 전염병에 관한 한 그들이 갖고 있는 사실보다 더 많은 사실을 갖고 있는 사람이 없을 것임을 고려할 때 등교 개학 문제도 방역당국이나 전염병 전문가들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하는 대신, “현실적인 문제”의 불가피함에 호소하면서 일반 시민들의 여론에 기대 등교 개학을 강제시킨 정부 당국의 처사는 비겁하고, 어찌 보면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