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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Sep 07. 2020

“꼰대들이 없으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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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 전부터 쓰고 싶었던 이야기다.


2


어젯밤이었다. 잠자리에 들려고 침대에 올랐다가 잠깐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초등학교 다니는 막둥이가 “아빠 머리에 흰머리가 왜 이렇게 많아?” 하고 물었다. 나는 “사람은 나이 들면 다 흰머리 생기는 거야.” 하고 대답했다. ‘그래, 어린 네 눈에도 요새 더펄더펄하게 휘날리는 내 흰머리가 눈에 띄었나 보구나.’ 나는 짐짓 심드렁하게 답했지만 금세 마음이 쓸쓸해졌다.


며칠 전에는 둘째와 막내가 협공 작전으로 ‘아빠는 꼰대’라며 놀렸다. 내가 시도 때도 없이 방 치워라, 책 읽어라, 휴지 조금씩 써라 잔소리를 해댄다는 것이었다. 부모로서 하는 가정 내 생활지도가 ‘꼰대질’이라고? 나는 어린 아해들이 농담하듯 흘려 보낸 몇 마디에 살짝 기분이 상했다. 정색하고 ‘꼰대 불가피론’을 설파했다.


“꼰대들이 없으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어? 이 사회가 그럭저럭 굴러가고, 서로 다르게 사는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려면 다른 사람에게 잔소리를 듣기도 하고 그래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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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렸을 때부터 워낙 호고주의 성향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언젠가 친구들과 함께 동네 뒷산에서 놀다가 어느 커다란 바위 밑둥치에서 한자들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그게 너무나도 신기해 한달음에 큰아버지께 가 한자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때부터 혼자서 한자 사전을 뒤적이고 글자를 익히는 것이 낙이 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어른들이 하는 말은 일단 깊이 새겨 들으려고 했다. 내 10대 시절 대부분과 함께한 삶의 터전은 전근대적인 분위기가 여전히 짙게 배어 있던 1980년대 농촌 공동체였는데, 어른들의 지식과 지혜가 당대의 농경적인 삶과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오늘날에는 나 같은 호고 성향의 사람들이 특이 성향의 별종을 넘어 시대 적응을 못하는 변태종 같은 취급을 받곤 한다. 오래된 것, 낡은 것에 대한 반감이 자연스럽고, 어른들의 말은 일단 제껴 놓고 보는 태도가 당연시된다. 젊음은 생명과 희망의 대명사로, 늙음은 조용히 사멸해야 하는, 덧없고 무의미한 것들의 대명사 취급을 받는다.


나이주의(ageism)의 위험한 화살은 노인 세대뿐 아니라(‘ageism’의 기본 어의 중 하나가 ‘노인 차별’이다.) 어린이, 청소년이 속한 10대를 향할 때가 많은데, 노인 세대가 나이주의자의 표적이 될 때 혐오와 배제의 감정이 배가되는 경향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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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설프게 ‘꼰대 예찬론’을 펼쳐보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고려시대 문인 우탁이 그랬던 것처럼 ‘즈럼길(지름길)’로 달려온 백발을 한탄하고 싶어서도 아니다. 다만 나는 우리가 나이를 먹어가는 일에 대해 어떤 시선을 드러내고 어떤 태도를 갖는지를 조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티브이 예능 프로그램에는 다양한 연령대의 연예인들이 공동으로 진행하는 방식의 프로그램이 많다. 이들 프로그램에서는 최연장자의 ‘나이 듦’이나 ‘늙음’을 대상으로 하는 혐오성 농담이 자연스럽게 오간다. KBS 2TV <1박 2일>의 연정훈 씨나 SBS <런닝맨>의 지석진 씨가 ‘나이’가 화제가 될 때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묘사되는지 살펴보라.


‘나이도 어린(젊은) 것이’만큼이나 위험한 말이 ‘늙어빠진 주제에’ 같은 말들이다. 이런 말들이 위험한 것은 저 ‘어린(젊은) 것’이나 ‘늙어빠진 주제’ 자리에 세상의 온갖 비주류들, 약한 사람들, 소수자들, 밑바닥에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을 넣어 그들을 손쉽게 차별하거나 배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사람의 생각이나 삶의 방식이 단지 우리와 조금 다를 뿐인데도 그를 혐오하게 하는 마력을 발휘하는 것도 이런 태도의 연장선상에서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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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스럽게도 변화의 흐름이 조금 보인다. 어떤 말이 꼰대성 발언임을 나타내는 표지인 ‘라떼는 말이야’가 광고나 홍보 문구에 단골로 등장하고 유행어처럼 쓰이고 있다. 거의 자동적으로(?) 꼰대 유형에 포함되는 연령층 부류인 ‘아저씨’들이 ‘아재’라는 정겨운 이름을 달고 사람들의 정서를 건드린다.


나는 자기의 개인적인 경험을 일반화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함으로써 타인을 억압하고 심리적으로 상처를 주는 전형적인 ‘꼰대질’은 단호히 비판한다. 그러나 꼰대라는 말이 단지 나이가 상대적으로 많은 사람을 향한 혐오 담화의 핵심어처럼 쓰이는 것은 문제다.


어떤 사람이 공동체의 연장자, 선배, 노인, 어른으로서 상대적으로 오랜 시간 동안 체득한 의미 있는 경험을 나누고, 숙련의 과정에서 얻은 기술과 정보, 지식과 지혜를 공유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꼰대’ 취급을 받더라도 자부심을 갖고 할 이야기를 해야 한다. 어떤 말이 듣기 힘든 비판이나 잔소리처럼 들린다고 해서 무조건 ‘꼰대질’로 매도당하는 사회 공동체는 건강해지기 힘들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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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와 혁신은 인류 역사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더 많은 자유와 여유를 누리면서 행복하게 살게 해 준 요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김수영의 말을 빌리면 때로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요강과 망건과 장죽은 퀴퀴하고 고리타분하다며 그것들을 모른 채 사는 세대에게 요강과 망건과 장죽을 썼던 사람들의 지식과 지혜는 영영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인간들이 꾸려가는 미래가 발전하고 진보한 세상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까.

  

1960년 유네스코 연설에서 아프리카 출신 소설아마도우 함파테 바(Amadou Hampatè Bâ)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노인 한 명이 죽는 것은 서재 하나가 불타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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