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택트’에 관한, 쓸데없이 ‘엄근진’한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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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김승환 전라북도 교육감이 ‘언택트(untact)’를 소재로 써서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공감하며 읽었다. 코로나-19 시대에 정체 불명의 말들이 오용되거나 남용되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꼬집는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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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택트’를 아는가. 영어 문자 속이 조금 있는 사람이라면 ‘접촉’이나 ‘대면’을 뜻하는 ‘콘택트(contact)’에 부정을 나타내는 영어 접두어 ‘un-’을 붙여 ‘비접촉’, ‘비대면’을 나타내기 위해 만든 단어라는 걸 눈치챌 것이다. 언택트는 2017년에 우리나라에서 비대면 기술을 뜻하는 용어로 처음 만들어졌다고 한다.
어느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언택트’를 검색어로 도서를 조사해 보았다. 책 36권이 떴다. 간행 연도가 모두 2020년이고, 가장 오래된 게 2020년 5월 발행본이다.(《VOC 4.0: 언택트 시대의 고객 경험 관리 전략》) 대부분이 최근 1~2개월 새에 나왔다. 《언택트 비즈니스》, 《언택트 심리학》, 《언택트 시대 생존 방법》, 《언택트 시대의 마음택트 리더십》 따위 제목들이 눈에 띈다. 코로나-19 전염병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언택트에 날개가 달렸다는 걸 알 수 있다.
내겐 언택트가 그다지 어려운 말이 아니다. 영어권의 ‘논콘택트(noncontact)’나 ‘노-콘택트(no-contact)’, ‘제로 콘택트(zero contact)’ 들보다 철자 수가 적고 발음하기가 쉽다. ‘키오스크(kiosk)’ 같은 단어에 비하면 말 자체도 그다지 어렵지 않다. 김승환 교육감의 과민반응 아닌가. 우린 오히려 언택트 창시자(?)에게 고마움을 표해야 하지 않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상 속 생활어는 될 수 있는 한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쉽게 따라 쓸 수 있는 것이 좋다. 그것이 합리적인 언어 생활을 할 수 있는 기본 요건이자, 언어 민주주의의 정신에도 맞다. 언택트보다는 비대면이 쉽다. 무인 단말기에는 비교적 손쉽게 다가가 화면에 손가락을 댈 수 있을 것 같지만, 키오스크 앞에 서면 지레 마음이 쫄아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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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출근하면 컴퓨터를 켜고 ‘전라북도교육청 업무포털’에 들어가 공문을 확인한다. 업무포털 사이트의 초기 화면은 1개의 수직선을 기준으로 좌우가 나뉜 구성 형식을 갖추고 있다. 왼쪽에는 교육청이 강조하고 홍보하는 교육 구호(?)나 문구가 시기에 따라 다르게 배치된다. 오른쪽은 로그인 화면이다.
최근 왼쪽 구호란에 이런 문구가 등장했다. “우리의 삶을 바꿉니다. 올바른 미디어 리터러시”. 나는 요즘 저 ‘미디어 리터러시’라는 말 때문에 괜히 심술이 난다. ‘미디어 리터러시 따위가 우리의 삶을 바꾼다고? 국영수 과목 없애고 미디어 리터러시만 가르치면 되겠네.’
가짜뉴스(배운 사람, 명망 있는 비평가, 관점과 철학이 뚜렷한 정치인, 기타 이런저런 이유로 유명한 사람들은 이를 ‘페이크 뉴스’라고 부르며, 그렇게 불러야 있어 보인다!)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말 정도면 충분하다. 일찍이 ‘대중매체 문해력’의 중요성을 깨닫고 실천해 왔다고 자부한 나를 이렇게 만들었으니, 저 문구를 만든 사람은 책임을 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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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이렇게 하지만 우리 삶이 올바른 미디어 리터러시와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으로 바뀔 수 있기를 바라고, 그렇게 된다면 정말 좋겠다. 그런데 나는 올바른 미디어 리터러시보다 더 확실하게 우리 삶을 바꾸는 방법이 올바른 언어를 사용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무엇이 올바른 언어인가.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모어, 더 많은 사람이 쉽게 쓰고 이해할 수 있는 말, 위계가 아니라 평등을 지향하는 말, 민주주의 정신에 부합하는 말, 우리 삶을 더 잘 그려주고 보여주는 말.
나는 언택트, 키오스크, 미디어 리터러시 같은 말을 내가 생각하는 올바른 언어 목록에 넣고 싶지 않다. 앞으로 언젠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대다수가 이 말들을 오늘날 우리가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같은 말을 쓰는 것처럼 일상적으로 자연스럽게 쓸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힐링’이나 ‘웰빙’ 같은 말이 거쳐 온 길을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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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이었다. 페이스북 친구인 조성범 선생님 글을 보고 경기도교육청에서 교원들의 재택근무 신청 유형을 가리키는 용어로 ‘스마트 워크 근무형’이라는 말을 만들어 쓴다는 걸 알았다. 깜짝 놀랐다.
나는 영어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말을 직접 만들어가면서까지 수만 명의 교사들에게 쓰게 하려는 특별한 정책적 배경이나 의도를 떠올리지 않고서는 저 무시무시한(?) 말을 받아들이거나 이해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실소를 지으면서, 저 말을 처음 만든 경기도교육청 공무원의 정신 세계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비난이나 조롱이나 냉소가 아니다.)
사람이 어떤 말을 쓰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며, 마땅히 그래야 한다. 다른 언어를 말한다는 것은 다른 영혼을 소유하는 것과 같다.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742~814) 대제가 남겼다는 이 말 속에는 언어와 인간 정신 사이의 밀접한 상관성이 담겨 있다. 언어는 그것을 쓰는 사람 자신의 정신이자 인격이다. 나는 언택트와 키오스크와 스마트워크를 애용하는 ‘그들’의 내면이 진심으로 궁금하다.(이 역시 비난이나 조롱이나 냉소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