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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Oct 09. 2020

무기력한 ‘조직인’에게 권한다

에리히 프롬의 《불복종에 관하여》를  읽고

1


복종은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서열 다툼에서 밀린 늑대나 사자는 우두머리 강자 앞에서 머리를 숙이거나 꼬리를 내리고 배를 드러내며 온몸으로 복종한다.


인간의 복종은 특별한 데가 있다. 강자와 권력자의 힘에 복종하고, 강자와 권력자의 힘에 맞서는 양심과 정의에 복종한다. 이 모순성은 호모 사피엔스 종 특유의 ‘생각하는’ 특성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2


지난 몇 주 사이 나치 선전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평전과, 괴벨스의 비서이자 타자수인 브룬힐데 폼젤의 인터뷰집을 읽으면서 떠올린 생각도 복종하는 인간의 양면성이었다.


괴벨스는 자신의 ‘양심’,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양심=아돌프 히들러=위대한 제3제국 독일’에 복종했다.


폼젤은 직장, 물질적 안정, 출세(“상층부에 속하고 싶은 욕망”)를 추동력 삼아 자기 삶을 이끌었다. 그 밑바탕에 상관에 대한 의무감과 직무에 대한 책임감이 있었다. 자기 욕망을 충족하면서 삶을 이끌어 간 근본에 권력(자)과 시스템에 대한 성실한 복종이 있었던 것이다. 폼젤은 그와 같은 삶이 양심에 따르는 길이라고 여겼다.


3


에리히 프롬은 이 책에서 두 가지 복종을 구분했다. 사람이나 제도나 권력에 복종하는 타율적 복종(heteronomous obedience)으로서의 굴종과, 자기 이성과 신념에 복종하는 자율적 복종(autonomous obedience)이 그것이다. 자율적 복종은 굴종 행위가 아니라 자기 의지를 밝히고 확인하는 행위다. 나의 신념과 판단을 따르는 것이다.


괴벨스와 폼젤 역시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이 자기 신념과 의지에 따라 살았으므로 양심적이었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프롬의 논지를 빌려와 이 문제를 해결해 보자.


양심은 두 가지 상이한 현상을 지하는 데 쓰인다. 권위주의적 양심(authoritarian conscience)은 내가 마음에 들고 싶거나 심기를 거스르기 두려운 권위자의 목소리가 내 안에 내면화된 것이다. 이와 구별되는 양심이 인본주의적 양심(humanistic conscience)이다. 이것은 외부로부터 부과되는 제재나 보상과 무관하게 모든 인간에게 존재하는 목소리다.


사람들이 자신의 양심에 복종한다고 할 때의 양심은 권위주의적 양심이다. 그것은 자기에게 내면화되어 있을지라도 결국 권력에 대해 복종하는 것이다. “의식상으로 나의 양심을 따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이미 나는 권력자의 원칙을 완전히 삼켜 내 안에 받아들인 상태”(15쪽)이기 때문이다.


4


이 책에 실린 에세이 4편은 프롬이 1960년대에 각기 다른 시기에 썼지만 책 제목인 ‘불복종’이 전편의 공통 관심사로 깔려 있다는 점에서 연작 성격을 갖는다. 불복종하는 인간의 힘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순응형 인간(‘조직인’)을 양산하는 관료주의 시스템을 극복해야 한다는 논지가 핵심이다. 20세기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관료주의를 기반으로 굴러간다.


“노동자들은 거대하게 조직화된 생산 기계의 일부이며, 이 생산 기계는 마찰이나 교란 없이 부드럽게 돌아가야만 작동이 가능하다. 개별 노동자들과 사무직원들은 이 기계의 부품이 된다. 그들의 기능과 활동은 그들이 속해서 일하고 있는 조직의 전체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 (59~60쪽)


프롬에게 불복종의 문제는 인류의 생사와 존망이 걸린 문제다. 인간의 역사는 불복종에서 시작(신의 명령을 거부한 아담과 하와, 제우스에게 거역하고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했으나 복종의 행위로 끝날지 모른다. 국가, 민족, 군사적 승리 같은, 과거의 낡은 물신에 복종하는 인간이 언제 스스로 절멸의 순간을 선택하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불복종은 무언가에 ‘맞서’ 이뤄지는 행위라기보다 무언가를 ‘향해’ 이뤄지는 행위다. 프롬에 따르면 불복종하는 태도는 능력, 역량이다. 그것은 ‘삶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가능하다.


“볼 수 있는 능력, 본 것을 말할 수 있는 능력, 보지 않은 것을 말하기를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인 것이다. 이를 위해 꼭 공격적이거나 반항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필요한 것은, 눈을 뜨고 온전하게 깨어 있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반쯤 잠들어 있기 때문에 소멸할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줄 책임을 기꺼이 맡고자 하는 의지다.” (35쪽)


양심과 의지를 갖고 불복종하는 자유인의 반대편에 매사 조심스러워 하는 조직인이 있다. 프롬에 따르면 관료들의 특징은 비인간성, 조심성, 상상력의 부족 등이다. 이들은 일과 사람을 행정적으로 관리하고 분배하며 사람도 사물 대하듯 대한다. 문제는 사람이 사물이 되고 사물처럼 관리되면, 관리를 하는 사람 자체도 사물이 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사물은 의지, 비전, 계획을 갖지 않는다.”(62쪽)


5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전형적인 ‘조직인’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높은 교사의 삶을 크게 돌아보았다. 교사의 생각, 언어, 업무, 활동, 판단과 결정, 인간관계 등 일상의 거의 모든 것이 법률과 규칙과 규정과 매뉴얼과 지침으로 관리되고 통제되는 학교 시스템이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대범한 교육자, 자기 목소리를 당당하게 내는 선생님이 교단에 서기 어렵다.


틈은 어디든 있다. 나는 교사가 학생과 학부모를 만날 때 그들을 ‘조직인’의 시선으로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들과 대화를 나눌 때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겠지만, 그것이 그들을 향한 상상력이 작동하는 것을 지레 막아버리는 수단으로 변질되어서는 안 되겠다. 교사는 학생과 학부모 이전에 한 명의 ‘사람’을 만나기 때문이다.


에리히 프롬은 우리가 불복종해야 하는 것과 진정으로 복종해야 하는 것을 분명히 구별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이 무기력한 조직인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특히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듯 교실에 들어서는 교사들에게 용기와 의지를 되새겨 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0 에리히 프롬 씀, 김승진 옮김(2020), 《불복종에 관하여》, 마농지, 1만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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