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전북교육청의 정책보고서(<교육과정 유형분류 및 척도개발 연구>; 연구책임자 박승배 전주교대 교수, 공동연구원 이윤미 이리동산초 교사) 한 편을 읽다가 ‘영 교육과정’과 ‘잠재적 교육과정’에 관한 내용을 인상적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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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즈너가 제안했다는 영 교육과정은 공식적 교육과정에 선택되지 않았거나 거기에서 배제된 교육과정을 뜻한다.[Eisner, E. W.(1994), The Educational Imagination, Macmillan Publishing co.]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가르치지 않은 지식, 사고방식, 가치, 태도, 행동양식으로서, 학생들이 아직 경험하지 못한 것들이 이에 포함된다. 보고서에서는 노동교육을 예로 들었다.
영 교육과정과 함께 ‘보이지 않는 교육과정’의 하나인 ‘잠재적 교육과정’이 있다. 잠재적 교육과정은 잭슨이 처음 제안했는데[Jackson, P.(1968), Life in Classroom, New York: Holt, Rinehart & Winston.],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계획한 교육과정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학교가 제공한 교육을 통해 학생들이 학습한 교육과정을 가리킨다. 상벌체계, 문화와 관행 들이 잠재적 교육과정을 형성하는 주요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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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814명(서울 76, 경기 172, 경상권 110, 전라권 290, 충청권 115, 강원․제주권 51; 표본 수는 384명이 기준임.)의 조사결과가 흥미로웠다.
예를 들어 교육과정의 범위를 ‘공식적+실행한+학습한+잠재적+영 교육과정’으로 인식한 비율이 가장 높은 배경별 변인은 초등학교, 혁신학교, 교육전문직, 10년~20년 미만 경력자 들이었다. 반면 중학교, 고등학교, 5년 이하 경력자 배경 변인에서는 교육과정의 범위를 ‘공식적+실행한+학습한 교육과정’으로 이해한 비율이 가장 높았다. 중고등학교 교사나 저경력 교사들이 잠재적 교육과정이나 영 교육과정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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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정은 교육철학적 측면에서 중요할 뿐만 아니라 학교의 현실적인 존재 이유나 근거, 실제적인 필요성 등을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학교교육의 처음이자 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육과정이 무엇이며, 어떤 학교와 교사가 교육과정을 통해 실현하려고 하는 목표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살핌으로써 학교교육의 의의를 따져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잠재적 교육과정과 영 교육과정이 중요한 까닭도 이와 관련된다. 실상 학생들이 학교를 기억하거나 회상할 때에도 이에 관한 것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다. 초등학교 5학년 시절 복도를 뛰다가 선생님에게 발견돼 호되게 야단을 맞은 일이, 같은 시기 수학 시간에 분수를 배운 일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기억되는 것은 그것이 단지 개인 차원에서 겪은 특별한 일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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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들이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반대로 학생들이 교사들은 바라보는 시선) 여하에 따라 학생의 학교 일상은 크게 달라진다. 나는 조너선 코졸이 《교사로 산다는 것》의 어느 대목에 남긴 다음 문장을 무척 좋아한다.
“학생의 기억에 가장 오래 남는 수업은 공책에 필기한 내용도 아니고, 교과서에 인쇄한 궁색한 문장도 아니다. 그것은 수업하는 내내 교사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메시지다. 그것이야말로 평생 잊히지 않는 교훈이 될 것이다.”
나는 코졸이 단지 교사의 열정과 의지를 강조하려고 이 문장을 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 코졸이 “교사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메시지”를 말하면서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은 잠재적 교육과정이나 영 교육과정이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나는 이것들이 교사의 삶과 철학, 그의 존재 자체를 학생들에게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강력하고 심오하며 거의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인간상의 한 전형처럼 보여주는 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믿는다. 학생은 교사의 곁을 떠나지만, 교사는 교육을 통해 학생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하나의 흔적을 남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