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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Jul 27. 2016

평범한 구경꾼, ‘악’의 편에 서다

‘구조적 폭력’과 사람들의 무심함에 대하여

1    


악은 평범함 속에 있다. 폭력은 파렴치한 조직폭력배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스베틀라나 스탈린은 전 소련 공산상 서기장 조셉 스탈린(Joseph Stalin, 1878~1953)의 딸이다. 1960년대 인도를 거쳐 미국으로 이민을 간 뒤 회고록을 집필했다.

그녀는 회고록에서 ‘안에서 바라본’ 스탈린을 다정한 아버지이며 배려심 많은 지도자로 묘사했다. 스탈린이 책임을 뒤집어 쓴 대량학살의 대부분이 사악한 협력자들, 특히 라브렌티 베리야(Lavrentiy Beria, 1899~1953)가 씌운 혐의라고 썼다. 베리야는 비밀경찰의 수장 출신으로 스탈린의 오른팔로 활약하다 유력한 후계자 물망에 오른 인물이었다.    


몇십 년이 흘러 베리야의 아들 세르고 베리야가 회고록을 썼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다정하고 가정적인 사람으로 그렸다. 아버지는 단지 스탈린의 명령만 따랐으며, 오히려 피해를 줄이기 위해 남몰래 애썼다고 했다.
    

스탈린의 또 다른 심복인 게오르기 말렌코프(Georgy Malenkov, 1902~1988)의 아들 안드레이 말렌코프 역시 비슷했다. 스탈린의 후계자인 자기 아버지는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으며, 항상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고 주장했다.    


슬라보예 지젝의 <폭력이란 무엇인가>(2012, 난장이)에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그들의 ‘진술’을 ‘진실’로 받아들이자. ‘대량학살’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슬라보예 지젝은 이 책에서 사악한 개인, 억압적인 공권력, 광신적인 군중이 행하는 폭력인 ‘주관적 폭력’과 대비하여 일종의 ‘초객관적 폭력’으로서의 ‘구조적 폭력’을 개념화했다.


스탈린과 베리야와 말렌코프는 ‘공산주의 체제’라는 ‘구조’를 위해 일했다. 말하자면 “그들의 삶에 ‘주관적인 악행’은 없었다. 다만 구조적 폭력이라는 보이지 않는 배경이 있었을 뿐이다”[슬라보예 지젝(2012), 위의 책, 36쪽]. 그러므로 대량학살에 관한 한 그들이 ‘무죄’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지젝이 말하는 구조적 폭력은 원래 전지구적 자본주의라는 사회적 조건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을 가리킨다. 그는 그와 같은 사회적 조건이 노숙인이나 실업자 등과 같이 배제됐거나 있으나 마나한 사람들을 ‘자동적으로’ 만들어낸다고 주장했다. 지젤 식의 “있으나 만나한 사람들”에 경제적 빈곤층이나 저임금 노동자 같은 사회적 취약 계층, 극한의 생활고나 경쟁 시스템에 시달리다 자살을 선택하는 수많은 사회적 ‘패배자’들이 포함될 것이다. 그들의 곤경과 죽음의 책임은 그들 자신 외에는 아무에게도 없다.


16세기 멕시코의 비극에서 한 세기 전 벨기에가 콩고에서 저지른 대학살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세계화의 결과로 죽어간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주의를 돌릴 때면 이에 대한 책임은 대부분은 부인된다. 그 모든 일은 그저 ‘객관적인’ 과정의 결과물로서 일어났을 뿐이며, 누구도 계획하고 실행한 적이 없었고, ‘자본주의 선언’ 같은 것도 없다. 콩고 대학살의 주범인 벨기에의 왕 레오폴드 2세는 대단한 인도주의자였으며 교황에 의해 성인칭호까지 받았던 사람이었다. - 슬라보예 지젝(2012), 위의 책, 42쪽.    


2    


스탈린, 베리야, 말렌코프, 레오폴드 2세의 사례에서 배우는 또 하나의 교훈은 우리의 개인적 경험과 우리가 저지를 수 있는 행동 사이에 막대한 간극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젝은 우리 내면의 삶에 대한 우리의 경험, 우리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근본적으로 거짓말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진실은 외부에, 우리가 하는 행동 속에 있다.”라고 외친다.  

  

똑같은 사람이 어떻게 적들을 향해서는 끔찍한 폭력 행위를 저지르면서 자기 집단에 속한 이들에게는 따뜻한 인간애와 친절을 베풀 수 있는가. 이는 순진한 윤리의식을 지닌 이가 언제나 놀라워하는 문제다. 무고한 민간인들을 살육한 군인이 자기 부대를 위해서는 기꺼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인질들을 쏘라는 명령을 내린 사령관이, 바로 그날 밤 자기 가족에게 진심 어린 사랑으로 가득한 편지를 쓰는 것은 또 어떤가? - 슬라보예 지젝, 위의 책, 83쪽.    


‘군인’과 ‘사령관’은 인간의 보편적 윤리 의식에 비추어 볼 때 모순적이다. “공동체의 내부에 속한 사람들에게 부여하는 기초적인 윤리적 권리를 그 외부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부여하지 않는 것은 인간이 자연스럽게 받아들 수 있는 것이 아니”(슬라보예 지젝, 위의 책, 83쪽)기 때문이다. 지젝에 따르면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윤리적 기질에 반하는 것이며, 그 속에는 인정사정없는 억압과 자기부정이 녹아 있다.

   

3    


지젝의 개념을 빌려 말해 보면, ‘군인’과 ‘사령관’의 사례에 내재하는 ‘억압과 자기부정’이나 ‘구조적 폭력’을 묵인하는 심리의 기저에 ‘물신주의적 부인(fethshist disavowal)’이라는 제스처가 깔려 있다. 물신주의적 부인은 자신이 본 것을 망각하는 데서 생겨난다. 이런 식이다. “나는 안다. 하지만 내가 안다는 것을 알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알지 못한다.”    


적당한 거리두기와 외면, 회피. 그것은 우리가 우리 멋대로의 신념을 간직하면서도 책임을지지 않은 채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편리한 방편이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사실을 모른 체하고 외면하고 회피함으로써, 그것을 알게 되고 그것에 계속 관심을 주었을 때 따라오는 여러 가지 부담스러운 결과들을 거부할 수 있는 명분을 쥐게 된다. 평범한 이들이 ‘중립적인 구경꾼’이 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악의 편에 서고, 구조적 폭력에 둔감하거나 심지어 지지하는 기제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배신 트라우마 분야의 최고 전문가인 제니퍼 프리드 미국 오리건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와 40년 경력의 임상심리학자로 활동한 파멜라 비렐 오리건대학교 심리학과 전임강사는 <나는 더 이상 너의 배신에 눈감지 않기로 했다>(2015, 책읽는수요일)에서 악을 외면하는 ‘구경꾼’의 심리를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이들은 모든 도덕률의 기본 교의가 어떤 도덕 체계에서든 그 중심에 놓이는 공정함과 배려라고 전제했다. 이들이 침해당했을 때, 피해자와 구경꾼은 모두 배신감, 구체적으로 정당함(옳은 것)의 배신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배신을 인식하고 반응하면 위험해질 수 있다는 이유로 배신에 눈을 감은 상태로 있기도 한다. 피해자가 배신의 ‘기억’을 망각하거나, 구경꾼들이 피해자와 거리를 두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구조적 폭력과 악을 존속시켜 더 많은 끔찍한 일들을 벌어지게 만들 수 있다. 프리드와 비렐은 구경꾼의 배신에 눈감기가 사람들이 대량 학살 같은 끔찍한 사건에서 보여주는 ‘정신적 마비’라는 반응의 기본 요소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들이 인용한 주디스 허먼 하버드대학교 정신의학 교수의 말을 들어 보자.    

가해자 편에 서는 것은 아주 유혹적이다. 가해자가 구경꾼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뿐이다. 그는 악을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않으려는 보편적 욕망에 호소한다. 하지만 피해자는 구경꾼들에게 고통의 짐을 나누자고 요구한다. 피해자는 행동, 참여, 기억을 요구한다. - 제니퍼 프리드 외(2012), 위의 책, 63쪽에서 재인용함.


* 제목 커버의 배경 사진은 스탈린이다. 한국어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98%A4%EC%8B%9C%ED%94%84_%EC%8A%A4%ED%83%88%EB%A6%B0)에서 빌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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