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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Dec 11. 2020

“가정의 초토화”와 가짜 公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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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자기 업무수첩에 기록한 김기춘 전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장의 (것으로 추정되는) ‘업무 지침’(아래 ‘지침’)이 2016년 12월 6일 자 <한겨레> 기사(“김기춘 ‘야간의 주간화・가정의 초토화・・・’ 살벌한 업무지침”)를 통해 일반에 공개되었다. 지침은 유려한 필기체로 쓰였는데, 공무원들 특유의 개조식 문체로 쓰여 있었다.     


路線
① 야간의 주간화
② 휴일의 평일화
③ 가정의 초토화
* 라면의 상식화
「명예를 먹는 곳, 어떠한 enjoy도 없다.」 모든 것을 바쳐 헌신.     


나는 처음 이 메모 사진을 보고 ‘헐’ 소리밖에 내지 못했다. ‘명예’가 중요한 공직자라지만, 그것이 밤낮과 휴일 없이 일을 하고 가정을 초토화해도 되는 근거가 될 수 없지 않은가. “어떠한 enjoy도 없다”는 대목이나 ‘헌신’ 같은 단어에 이르러서는 두려움마저 일었다.     


교사나 시민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 설 때마다 예의 지침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김기춘 씨 같은 공직자들의 살벌한(?) 정신세계가 어떤 배경 속에서 구성되었으며, 그 과정에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이나 사회구조가 미친 영향이 무엇일지 함께 짚어보자는 제안을 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웃음을 웃다가 곧 심각한 표정들을 지었다.     


2     


김기춘 씨는 1970년대 초반 유신헌법을 만들기 위해 독일까지 날아갔을 정도로 (권력자에게)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은 검사였다. 박정희가 구상한 내용을 초안으로 구체화한 사람이 김기춘 씨였다. 이런 능력에 저런 성실한 태도를 겸비한 사람의 내면은 보통 사람과 많이 다를 것 같았다.     


내 기준에 의하면, 수첩 내용과 같이 강렬한 메시지는 현실 공무원들의 현장에서 반농담조로 이야기할 때나 나올 것 같다. 하지만 눈매나 표정이나 전체적인 분위기로 보아 업무 스타일이 꼼꼼하고 날카롭고 깐깐할 것 같은 김기춘 씨가 저런 말을 농삼아 던졌을 가능성은 별로 높아 보이지 않는다.  

   

당시 발언 현장에 함께 있있던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은 김기춘 씨가 그런 자세를 갖고 충실히 업무에 매진해야 한다는 취지로 웃으면서 말했다고 증언했다고 한다. 하지만 부하직원들 앞에서 성실과 복종의 메시지를 강조하는 근엄한 노실장의 말은, 웃음과 함께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카리스마를 뿜어냈을 것 같기도 하다. 고 김 전 수석이 김기춘 씨가 웃음 속에 던진 그 말을 그대로 받아 적은 까닭도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농담을 수첩에 적는 일은 흔치 않다.

     

김기춘 씨가 공직 수행에 임할 때 취하려고 했던 철두철미한 자세는 말로만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평소 그것을 행동으로 보였고, 그러한 행동에 감화를 받은 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호성 전 비서관은 김기춘 씨가 “공직자로서 훌륭한 분이었다.”라면서 “본인의 가치가 확실하고 공직자로서 멸사봉공(滅私奉公)으로 임해온 것으로 안다”라고 평가했다. 몇 년 전 국정농단 재판에서 행한 증언 중에 나온 말이었다.     


3     


멸사봉공의 자세로 성실하게 공직에 임하는 공무원의 자세를 비난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자세와 태도를 근거로 자기 행위를 합리화하는 수많은 모범적이고 성실한 공직자들이 우리와 우리 사회에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나는 그들의 태도가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내면의 정신세계는 비판받아 마땅하며, 우리가 찬찬히 짚어볼 지점이 참으로 많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늘도 멸사봉공의 자세로 성실하고 복종하며 수많은 업무를 처리하고 있는 이 땅의 공직자들을 떠올린다. 멸사봉공의 이면에 은밀하게 숨긴 개인의 욕망에 봉사하는 은사봉사(隱私奉私)의 태도가 없는가. ‘공’의 자리에 진짜 ‘公’이 아니라 승진, 권력자, 패거리 이익 같은 가짜 公이 자리잡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진짜 公과 가짜 公을 가르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걸 잘 안다. 묵묵히 성실하게 공직에 임해 승진한 수많은 이들의 명예를 함부로 재단해서도 안 될 일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가짜 公에서 벗어나 진짜 公으로 무장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다.      


4     


안타깝게도 진지한 소수들은 갈수록 줄어드는 것 같다. 공부와 학습의 직접적인 증표라 할 수 있는 책읽기 문화가 지리멸렬해진 지는 오래다. 우리나라 성인들의 독서율이나 학습능력이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들 중에서 바닥권을 기고 있다는 말도 심심찮게 듣는다.   

   

작년에 나온 독서 관련 통계(2019 국민독서실태조사)를 살펴보니 우리나라 성인들은 학생들보다 거의 4배 가까이 책을 적게 읽는다.(6.1권 대 32.4권; 종이책 기준) 성인들과 학생들 간의 독서율 차이도 거의 2배 수준이다.(52.1% 대 90.7%) 더 큰 문제는 이런 격차가 더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책을 읽으며 스스로 공부하는 어른들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말이다.     


5     


나는 가짜 公에서 벗어나 진짜 公으로 무장하기 위한 행동의 맨 앞자리에 공부와, 이를 통한 자기성찰의 태도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지난행이(知難行易)에 숨은 의미를 깨닫는 순간 더 진정성 있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 상식과 달리 스스로 궁구하며 깨달아 제대로 알기는 어렵고[知難] 주어진 자리와 체제 안에서 명령과 지시에 따라 행하기는 쉽기 때문이다.[行易]     


나는 지난행이의 참된 뜻을 알고 이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리처드 호가트의 말을 빌려 “진지한 소수들”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런 진지한 소수들이 우리 사회에서 더 큰 영향력과 힘을 발휘했으면 좋겠다.     


나는 이 진지한 소수들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이들은 언제나 공부하려는 마음가짐을 갖춘 사람들이며, 대체로 퇴근 후 혹은 그다지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열심히 학습하는 사람이다. 이들의 모습이 종종 왜곡되어 그려지긴 하지만, 이들이 지식의 힘과 미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임은 분명하다. - 리처드 호가트(2016), 《교양의 효용》, 오월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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