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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Jan 25. 2021

내 언어의 주인은 누구인가

호모 라이터스_글쓰기의 민주주의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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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들은 보고서나 신청서나 계획안을 작성해 기안할 때 관련 공문에 첨부되어 오는 ‘(예시)’에 기댄 ‘예시체’를 애용한다. 그런 교사들을 비난할 생각이 없다. 교사가 수업을 하는 틈틈이 각종 공문을 처리하기 위해 학교 관계자들과 협의하고 관련 내용을 바탕으로 기안하는 일은 많은 시간과 상당한 주의 집중도를 필요로 한다. 교육 당국이 학교 교사들이 겪는 이런 사정을 고려해 배포한 참고자료가 이른바 ‘예시’다. 그러니 교사들이 공적 경로를 통해 학교에 도착한 예시문들을 사용한다고 해서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그런데 습관적으로 예시문에 기대 글짓기를 하는 행위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나는 예시문이 교사 스스로 자기 생각을 벼리고 자기 언어를 고민해 쓰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다. 예시문의 형식과 내용에 교육적인 측면이 담겨 있는가와 무관하게 교사가 공문이나 계획안이나 보고서를 생산할 때 예시문에 기대면 기댈수록 자기 언어에서 멀어질 것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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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 2018년부터 2년간 ‘학교폭력책임교사’라는 이름표를 달고 학교폭력 관련 업무를 전담했다. 학교에서 특정 업무를 맡은 교사를 가리킬 때 ‘시수계’나 ‘봉사활동계’처럼 ‘담당 업무명+계(원)’ 조어법에 따라 만든 호칭어를 사용하는 관행에 비춰보면 ‘학교폭력계’, 줄여서 ‘학폭계’라고 부르는 것이 자연스러울 텐데, 주변에서 그런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를 별로 보지 못했다.


나는 ‘학교폭력책임교사’라는 명칭이 싫었다. 마치 학생들이 학교 안팎에서 일으키는 모든 폭력 사안을 학교폭력책임교사 교사 혼자서 책임져야 한다는 듯한 뉘앙스가 느껴져 부담스러웠다. 학교폭력 사안과 관련된 학생과 학부모들을 불러 갈등 조정 모임을 가질 때 나를 ‘학교폭력전담교사’나 ‘학교폭력담당교사’처럼 좀 더 중립적으로 보이는 단어를 사용해 소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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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폭력책임교사라는 이름은 내가 실제 학교폭력 사안을 조사하고 매뉴얼에 정해진 절차에 따라 거쳐야 하는 행정 업무를 처리할 때 내게 상당한 중압감을 행사했다. 법적으로 전체 학사를 통할하면서 최종적인 책임을 지는 교장이 있었고, 학교폭력 사안을 처리하는 학내 회의체인 학교폭력전담기구와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학폭위) 위원장을 교감이 맡고 있었다. 하지만 학교폭력 사안이 발생하면 그 일이 온통 내 책임이며, 사안 처리 절차 책임이 온전히 내게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학폭위를 열어 사안을 심의, 의결한 뒤 사안결과통보서와 사안결과보고서를 작성할 때마다 고민했다. 학교폭력 사안은 똑같이 학교폭력 사안이라고 불려도 매 사안의 성격이나 특징에 차이점이 존재했다. 사안 발생 경위, 배경, 관련학생들 사이의 친소 관계, 그들이 속한 학급 집단이나 또래 집단의 내부 분위기, 문화 등에 따라 사안의 수준이나 심각도가 달랐다. 원칙적으로 이 모든 점들을 고려한 바탕 위에서 학폭위 회의에서 쓰이는 언어가 결정되고, 그에 따라 사안결과보고서와 사안결과통보서 같은 서류들의 문장 역시 다르게 쓰여야 했다.

 

나는 그렇게 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우리 학교에서는 학폭 사안을 학폭위에 회부하기 전에 당사자 모두가 참석하는 ‘갈등 조정 모임’을 거쳤다. 가해 관련 학생 측과 피해 관련 학생 측이 함께 모여 혹시 있었을지 모를 오해를 풀고 화해 조정에 이르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운영해 온 자치적인 성격의 의사소통 기구였다. 학폭위에 올라온 사안들은 갈등 조정 모임에서의 조정 절차가 결렬된 것들이었다. 원칙적으로 성격이 다른 사안들이고, 결렬에 작용한 이유들 역시 여러 가지였다.


하지만 사안마다 갖는 고유성은 모두 거세되었다. 학폭위까지 오게 됐다는 이유 하나로 매 사안이 “심각하고 엄중한” 사안이 됐다. 학폭위 위원들이 사안을 심의하고 의결하면서 쓰는 언어, 회의에 임할 때 보이는 태도에 사안의 심각성과 엄중함이 어른거렸다. 학교장에게 올라가는 사안결과보고서와 학생과 학부모 측에 전달되는 사안결과통보서를 작성하는 내 손끝에서 “심각하고 엄중한” 같은 관형어구가 포함된 문장이 습관적으로 튀어 나왔다. 그것은 교육 당국에서 내려보낸 학교폭력 처리 매뉴얼상의 서류 양식에 담긴 예시문과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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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일어난 폭력 사안 중에 심각하고 엄중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인간에게 폭력은 심각한 절대악이므로 엄중하고 엄정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대원칙에 반론할 생각이 없다. 그러나 학생들 사이의 관계는 일도양단하듯 명쾌하게 정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학교폭력의 상당수는 미묘하고 섬세하며, 때로 당자사 학생들의 뜻이나 의지와 무관하게 실제와 다르게 왜곡된 구도 아래서 발생하기도 한다. 나는 이런 사실을 모른 체하고 학폭위에 올라온 사안들을 모두 “심각하고 엄중하게” 다스려야 하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나는 자문해 본다. 내가 즐겨 쓰는 이 언어는 주인이 누구인가.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심각하다’를 “상태나 정도가 매우 깊고 중대하다. 또는 절박함이 있다”라고 풀이한다. ‘엄중하다’는 “몹시 엄하다”인데, “엄하다”에는 “어떤 일이나 행동이 잘못되지 아니하도록 주의가 철저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이 정도 의미라야 학교폭력을 일으킨 학생들이 법률이나 학교 훈육 시스템의 엄정함을 교훈적으로 느낄 수 있으니, 내가 습관적으로 쓰는 저 표현은 적당하고 적절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정말 그럴까.


학생들은 학교폭력에 휘말려 들었다가도 금방 친하게 지낸다. 학교급이 낮거나 학생들의 나이가 어리고, 폭력의 심각성이나 엄중함의 수위를 가늠하기 어렵거나 애매한 사소한 말다툼, 장난처럼 이루어진 몸싸움 같은 학교폭력 사안 중에 그런 경우가 많다. 나는 학교폭력책임교사를 맡아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런 사안들에 ‘경미한’, ‘우발적으로 일어난’, ‘장난처럼 시작한’, ‘가해 관련 학생 자신도 모르게’ 같은 관형어구나 부사어구를 써서 수식했다. 처음에는 학교폭력책임교사를 맡은 책임감 때문에 쉽게 그렇게 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도 내 손가락 끝에서는 “심각하고 엄중한” 같은 수식 표현이 언제 튀어나올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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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언어의 주인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가 글쓰기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늘 심각하게 생각해 볼 주제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평범한 단어 하나, 두어 어절의 짤막한 어구가 정치적인 논란의 한복판에서 주인공 노릇을 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 내가 평이한 일상어를 즐겨 쓰는가, 전문어나 학술 언어를 선호하는가에 따라 사람들은 나를 각각 다른 사람처럼 인식한다. 그것은 내가 쓰는 언어가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니며, 내가 어떤 언어를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내 정체성 역시 결정된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소설 《1984》에서 가상의 독재자 빅 브라더(Big Brother)가 통치하는 오세아니아 당국은 전체주의를 강화하고 시민들의 사상을 통제하기 위해 수십 년에 걸쳐 신어(Newspeak) 제정 및 사전 편찬 작업을 실시한다. 신어는 오세아니아의 공용어로서, 영사(英社, IngSoc), 곧 영국사회주의(England Socialism)의 이념적인 필요성에 부응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신어를 고안한 목적은 영사 신봉자들에게 걸맞은 세계관과 정신 습관에 대한 표현 수단을 제공함과 동시에 영사 이외의 다른 사상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데 있었다.


신어는 일상어 단어군인 ‘A어군’, 정치적 목적을 위해 용의주도하게 만들어진 낱말로 이루어진 ‘B어군’, A어군과 B어군을 보조하면서 과학적이거나 기술적인 용어들로 쓰기 위해 만들어진 ‘C어군으로 구성된다.


오세아니아 당국이 신어를 제정해 사전에 싣는 과정에서 고려하는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 그중 내 눈길을 끈 것은 몇몇 포괄적인 어휘가 정치‧사상적으로 불온한 구어(Oldspeak), 예를 들어 honour(명예), justice(정의), democracy(민주주의) 같은 단어들을 대신하게 하는 일이었다. 이들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에 의미장이 넓은 포괄어로써 이들 단어를 대체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당이, 궁극적으로 사람들이 뇌 신경을 전혀 쓰지 않고 목구멍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기를 바란다는 원칙을 강조하는 것도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오세아니아 신어에서 B어군에 속하는 duckspeak(오리말)은 ‘오리처럼 꽥꽥거리는 것(to quack like a duck)’을 가리키는 말로서 무뇌아처럼 말하는 사람이 하는 말을 지칭한다. 오웰의 서술자는 꽥꽥거리며 말하는 의견이 정통적인 것이라면 이는 칭찬을 의미하며, 작중에서 <타임스(Times)>가 당의 한 연사를 두고 ‘doubleplusgood duckspeaker(더욱 더 좋은 오리말을 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면 그는 더없이 따뜻한 호평을 받은 셈이라고 풍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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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시체’라는 소재로 이야기를 시작한 이 글의 마지막을 음울한 독재 국가 오세아니아의 신어에 관한 이야기로 끝맺는 것이 유감스럽다. 오세아니아는 허구 세계 속 국가이며, 신어는 가상의 언어이므로 현실 세계를 사는 우리와 무관하다. 나는 우리나라 교사들이 예시체를 습관적으로 쓴다고 보는 것은 성급한 추단이며, 예시체를 종종 빌려 와 쓰는 교사들도 극히 일부라고 믿는다.


그러나 내가 쓰는 언어의 주인이 누구이며, 내가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쓰는 언어의 진짜 주인이 나인가.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유보하고자 한다. 지금 내가 쓰는 언어의 진짜 주인이 나인지 확신하지 못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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