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는 세계적인 명성이나 세평과 달리 기대 이하였다. ‘명허전’. 별점 2개 정도나 줄 수 있을까. 저자가 인간 종을 바라보는 시선에 어떤 특별한 통찰이 담겨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책을 읽다가 서가로 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이 몇 번이나 일었으나, 그와 무관하게 하라리와 《사피엔스》가 세상에 가져온 충격파는 엄청났다.
그런 유발 하라리가 네덜란드 저널리스트이자 사상가인 뤼트허르 브레흐만이 쓴 《휴먼카인드》(2021, 인플루엔셜)의 추천사 첫머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 본성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갖게 만들어주고 오랫동안 이어온 나의 신념에 도전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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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본성에 관한 하라리의 신념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통념에 가까운 그의 관점은 우리 모두의 것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모든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오늘날 정치와 경제 분야에서 이루어지는 거의 모든 기획과 실천은 이러한 통념에 기반한다.
악하고 이기적이라는 인간 본성에 관한 통념은 영향력 있는 연구 결과들에 힘입어 자가 발전해 왔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필립 짐바르도의 ‘스탠퍼드 모의 감옥 실험’과 스탠리 밀그램의 ‘권위에 대한 복종 실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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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두 실험을 소개하고 분석한 책(《루시퍼 이펙트》, 《권위에 대한 복종》)을 직접 사서 읽으면서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른다. 개시 6일만에 실험을 중단할 정도로 인간 본성의 암울한 진실들이 드러났다고?(짐바르도 실험의 경우) 사람들은 권위 있는 사람이 명령하면 별다른 생각 없이 다른 사람을 죽음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고?(밀그램 실험의 경우)
그러나 “(스탠퍼드 모의 감옥-글쓴이) 실험 이후 수십 년 동안 수백만 명의 사람들은 필립 짐바르도의 무대에서 벌어지는 익살극에 속아 넘어갔다.”(224쪽) 밀그램이 고안한 전기 충격 실험은 인간이 생각 없이 악에 복종하는 존재라는 “단순한 추론”(248쪽)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의도된 결말에 따른 것이었다.
짐바르도와 밀그램의 실험 결과는 음울하고 악한 인간 본성에 관한 통념을 강화하는 데 결정적인 근거로 작용했다. 두 사람은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는 다분히 의도적이고 치밀한 사전 ‘공작’의 결과 덕분인 것처럼 보인다. 짐바르도는 자료를 분석하기도 전에 실험 영상을 방송국에 보냈다. 28살의 밀그램은 “명성과 찬사를 좇는 의욕 넘치는 심리학자”(236쪽)였다.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오도하고 조작한 남자. 자신을 신뢰하고 돕고자 했던 사람들에게 의도적으로 심각한 고통을 준 인물. (236쪽)
밀그램의 실험에서는 피험자들이 실험 상황이 실제 상황인지, 아니면 가짜로 연출된 상황인지를 어느 정도 믿고 있었는가가 결과의 신뢰성에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밀그램의 연구 보조원 중 한 명이 끝내 발표하지 않은 사후 설문 조사 분석 자료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기 충격이 진짜라고 믿으면 그만두었다고 한다.(달리 말해 최고 전압인 450볼트 버튼을 누른 사람들은 실험이 가짜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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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바르도와 밀그램의 사례는 극히 일부다. 이 책에는 특정 저자나 저작, 이론, 주장이나 관점의 명성과 권위가 어떤 토대 위에서 만들어져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갖게 되는지, 그로 인한 폐해나 문제가 얼마나 클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들이 무수히 담겨 있다.
또한 이 책은 우리가 한 권의 책을 읽고 저자의 관점을 수용하거나 거부할 때 비판적인 자세를 잃어서는 안 되며, 조금이라도 의구심이 들 때에는 사실 확인과 검증에 얼마나 철저한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를 다양한 예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인간 본성에 관한 무수한 논의들에서 잘못된 인용과 확대 재생산의 사례로 제시한 이스터 섬 이야기는 자못 충격적이다. 이스터 섬은 야만적인 원주민들의 이기심과 욕망이 아니라 문명의 침입으로 인해 무너졌다. 이스텀 섬을 멸망시킨 것으로 알려진 전쟁, 기근, 식인 풍습은 그곳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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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 문제를 이해하고, 그에 대한 해법을 논의할 때 가장 손쉬운 방법은 인간은 원래 이기적이고 나쁜 본성을 지닌 존재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 죄를 지으면 최대한 강하게 처벌하고, 행정과 법률과 교육은 불신을 전제로 기획된다. 저자는 이와 반대로 본다.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많은 개방성, 더 많은 인류애야말로 가장 쉽지 않은 일이다. 반대로 거친 말, 보복, 국경 폐쇄, 폭탄 투하, 세상을 선과 악으로 나누는 것은 쉬운 일이며, 이것이야말로 문제를 외면하는 행위이다. (461쪽)
세계에서 가장 낮은 재범률을 자랑하는 노르웨이에서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호화스러운(?) 교도소가 ‘정상성 원칙’(수감자들이 정상적인 삶을 준비할 수 있도록 교소소 내 시설과 생활을 최대한 일반 사회처럼 유지하는 것)에 따라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비용이 꽤 드는 일 같지만(실제 노르웨이 교도소의 수용비용은 유죄판결 건당 평균 6500만 원으로, 미국의 약 2배에 이른다고 한다.), 수감자들의 재범 횟수와 이에 따른 행정 비용, 희생자 수 감소에 따른 유무형의 사회적 이익 등을 수치화하면 훨씬 “더 좋고, 인간적이고, 경제적인 시스템이다.”(444쪽) 미국 연구 팀의 조사 결과, 노르웨이에서는 수감자의 20퍼센트가 2년 뒤 다시 교도소로 들어간다. 선악의 이분법에 따라 강력한 처벌 시스템을 채택하는 미국에서는 그 비율이 60퍼센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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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부제는 “감춰진 인간 본성에서 찾은 희망의 연대기”다. 지난 3월 2일 초판 1쇄가 나온 뒤 1주일 만인 3월 9일 4쇄를 찍었다. 나는 이 책이 최대한 빠른 속도로 400쇄, 4000쇄를 넘어 독자들에게 계속 읽히기를 바란다. 학생들에게는 내 인생의 책 중 한 권으로 소개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