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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Oct 28. 2021

네 편과 내 편 사이에서

이선옥 작가의 《단단한 개인: 누구의 편도 아닌 자리에서》을 읽고

1     


모두가 ‘예’를 말할 때 ‘아니오’라고 말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선옥 작가의 <단단한 개인>은 그런 용기가 주는 힘으로 쓰인 책처럼 보인다.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이 선입니까?’라고 물을 때 이선옥 작가는 모두의 ‘예’가 아니라 자신만의 ‘아니오’를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작가가 의지하고 기대하는 것은 “누구의 편도 아닌 자리에서 독립된 지성을 가진 단단한 개인들”이 가져오는 정의다. 그렇게 정의의 편에 설 때 약자도 지켜진다.

     

2     


이 책에는 이슈가 된 사건을 통해 바라본 사안 판단의 기준과 과정의 공정성 및 합리성 문제, 최근 한국사회를 흔드는 페미니즘 담론이 놓치고 있는 측면들, 권리 충돌과 차별의 문제에 대한 작가의 생각과 논증이 쉽고 간결한 언어로 기술되어 있다.      


‘공정함의 공정’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들어보자. 우리는 피의사실 공표 금지나 무죄추정의 원칙에 관한 문제의식을 다수의 미투(Me Too) 사건에 대해서도 일관되게 적용하고 있는가. 헌법과 법률이 규정하는 이 대원칙이 원칙으로 살아 있으려면 보편성과 일관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당신(진영)의 기준이 모두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당신의 예민함이 곧 정의가 아니며 당신의 불편함이 곧 불의의 근거도 아니다. 우리는 좀 더 공정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공정함은 네 편도 까고 내 편도 까라는 의미가 아니라 어떤 사안이든 넘지 않아야 할 선, 지켜야 할 규범, 유혹은 견디는 힘을 만드는 일이다.” (17쪽)     

3     


이 책에서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하는 내용은 한국 사회 페미니즘 담론에 관한 문제제기다. 반론과 비판이 차단되면서, 기존의 권위와 질서에 도전하는 주체였다가 도전받는 주체로 역전된 ‘대한민국’ 페미니즘, 여성을 피해서사의 주인공으로만 두는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문제, 젠더 이슈마다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는 진보언론의 태도 문제 등이 작가의 손끝에서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 비판을 통해 작가가 독자들에게 되묻는 것은 인간의 가치, 책임, 공정과 균형의 문제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가치이지 페미니즘이 아니다. 결과를 책임지지 않는 극단주의자들이 우리를 대표하게 해서는 안 된다. 공정함을 상실한 편향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이렇게 작가가 하는 말들에 천천히 눈길을 주며 읽다 보면 성별 갈등에서 중심을 잡는 일이 문제 해결의 중요한 조건임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4     


국어 교사로서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읽은 대목은 제3부 ‘말의 무게’였다. 2017년 일군의 남성들이 ‘가해자 인증 캠페인’을 벌였다. 이 캠페인은 남성이 “나는 잠재적 가해자입니다”라는 문구를 쓴 피켓을 들거나, 해당 문구 해시태그와 함께 피켓 사진을 올리고 여성 대상 혐오와 범죄에 대해 방관자로 살지 않을 것을 다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남성 일반을 ‘잠재적 가해자’처럼 생각하는 관점이 의외로 꽤 퍼져 있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작가는 잠재적 가해자라는 말이 캠페인 참여자들의 주장처럼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도 없고 피해도 주지 않는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잠재적 가해자는 전자 발찌를 채운 성범죄자처럼, 성범죄의 잠재적 가능성을 전제로 할 때만 쓸 수 있는 말이다.


작가는 말의 상징성을 예민하게 바라보는 시선, 언어의 정교함, 신중함과 관대함 등을 강조했다. 이들 모두 말의 무게를 섬세하게 헤아리는 태도를 전제로 한다.


“예맨 난민 사태가 불거졌을 때 예멘인들을 ‘잠재적 성범죄자’, ‘잠재적 강간범’이라 부르며 수용을 반대하는 여성들이 있었다. (중략) 센 언어, 선정적인 단어들에 취해서 벌이는 운동은 불안하고 위험하다. 권리와 권리 아닌 것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목소리 큰 자들이 자의적으로 규범을 독점하는 결과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88쪽)      


5     


이선옥 작가는 2010년 전태일문학상 기록문 장편 부문을 수상했다. 저자 소개 글에 따르면 “한때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자리매김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냥 단단한 개인”으로 살고 있다. 기록문은 사실을 핍진하게 모사하는 다큐멘터리 글 장르다. ‘-주의자’가 아니라 ‘개인’으로 사는 사람은 글에 자기 언어를 담으려고 노력한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과장하거나 윽박지르지 않으면서 자기 생각을 평범한 일상어로 차분하게 풀어 나간다. 책 속 문장들은 건조하고 담백하며, 문장 사이에서 느껴지는 호흡은 시종일관 차분하다. 그렇게 해서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메시지는 하나다.     


“나의 생각을 세우는 일에 치열하고 집요하면서도, 타인의 다름을 존중하는 유연함을 가진 단단한 개인들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10쪽)   

  

* 이선옥(2020), 《단단한 개인: 누구의 편도 아닌 자리에서》, 필로소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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