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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Feb 23. 2021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재미교포 작가 강용흘의 《초당》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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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재미교포 소설가 강용흘이 쓴 장편소설 《초당》을 한국 근‧현대 교육사를 다룬 몇 권의 연구서에서 처음 만났다. 소설이 교육사 연구서의 본문이나 참고문헌 서지 목록에 실리는 일은 흔치 않다. 호기심이 일었다.


교육사 연구자들이 《초당》을 참고한 까닭은 근대교육의 초창기 모습에 관한 정보들이 《초당》에 풍부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침 나는 근대 이후 우리나라 학교교육이 전개된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언젠가 내 나름의 관점과 방식으로 간략한 학교 통사를 저술할 계획을 가슴에 은근히 품고 있었다. 기대감이 커졌다.


곧장 인터넷 서점에 접속해 책을 검색해 보았다. 2015년 7월 범우출판사 판 개정 1쇄가 있었다. 절판된 상태였다. 2002년판도 있었는데 역시 절판이었다. 2015년 범우사 개정판이 초판인 2002년판을 저본으로 한 듯했다. 상거 13년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초판과 개정판이 간행됐다는 것은 그만큼 책을 찾는 손길이 (많지 않지만) 꾸준했다는 방증일 터이다. 책을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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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흘은 1898년 함경도 흥원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 운동 후 중국과 일본을 거쳐 도미(渡美)해 보스턴 대학에서 의학을, 하버드 대학에서 영미문학을 공부했다. 그 후 《대영백과사전》의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창작에 전념했다. 1931년에 영문으로 첫 소설 작품인 《초당》을 썼다.


《초당》은 1934년 구겐하임(Guggenheim) 상과 북 오브 더 센추리(Book of the Century) 상에 선정되었고, 프랑스와 독일 등 10여 개 국에서 번역, 출판되었다. 국제상 수상 사실이 작품성을 보증하는 기준일 수는 없겠다. 나는 《초당》만의 독특한 매력과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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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은 자전적 소설이다. 소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제는 나의 생애에 대해서, 나 자신의 펜으로 진실을 이야기해야겠다.” 주인공 ‘나(청파)’는 함경도 깊은 계곡 사이에 자리 잡은 ‘송전치’라는 마을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내고, 10대 초반 혈혈단신으로 서울에 가 신학문을 접한다. 이후 일본으로 갔다가 귀국해 3.1 운동에 참여한 뒤 고초를 겪고 우여곡절 끝에 도미한다. 작가 강용흘이 거쳐 온 생의 여정과 거의 그대로 겹친다.


자전적 소설은 주로 회고담 성격을 띤다. 과거를 회상하면서 인상적인 사건들을 나열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기 때문에 구조가 단조롭고 읽는 재미를 느끼기 어렵다. 《초당》의 성격과 구조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작가에게는 특별하겠지만 독자들에게는 단순한 호기심을 끄는 수준 정도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적 일화들이 단조로운 1인칭 주인공 시점에 따라 서술되었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며칠만에 완독했을 정도로 큰 재미를 느꼈다. 위와 같은 자전적 소설의 특징들이 재미를 가져다 준 것 같지는 않다. 구겐하임 상이나 북 오브 더 센추리 상의 심사자들 역시 《초당》의 매력이나 가치를 그런 점들에서 찾진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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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을 우리말로 옮긴 문학평론가 장문평은 책 말미에 실은 짤막한 ‘작품론’의 제목을 “동양정신의 메신저”라고 옮겼다. 미국 작가 펄 벅은 《초당》을 “가장 빛나는 동양의 지혜‘라고 평했다고 한다.


《초당》에는 한국적 유교 문화를 대표하는 선비정신, 한민족의 정신과 사상, 한국 고유의 풍속과 문화에 관한 소재들이 풍성하게 담겨 있다. 김천택과 김수장 등 조선 후기 풍류 가객들의 시조, 윤동주와 한용운 같은 한국 현대시를 대표하는 시인들의 작품들, 개인 서정(抒情)과 시속(時俗) 세정(世情)을 반영하는 한시, 격언, 속담, 야담 들이 작품 본문 곳곳에 전편이나 부분 인용 방식으로 실려 있다.


소설의 가독성을 떨어뜨리고 이야기 자체의 긴장이나 묘미를 반감시키는 요소들이다. 더구나 이런 소재들은 작품 전체를 국수적으로 보이게 한다. 국권 침탈과 3.1. 만세운동으로 이어지는 작품의 시대적 배경에 주목해 민족주의적인 주제의식이 과다하게 표출되는 작품이라고 이해하는 독자도 있겠다.


나는 이 모든 점들을 뛰어넘는 《초당》만의 특별한 매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않는 우리 민족 정신의 정수, 지금 우리 삶을 있게 한 면면한 과거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의미와 가치 같은 것들이다. 강용흘은 이들을, 내가 보기에 소설 미학적 가치가 낮은 기술 문장으로 표현한다. 나는 이 점이 작품 전체를 참신하게 만든 요인이었다고 해석한다.


“우리 집안에는 언제나 방랑자가 있었다. 나의 조부 외에도 탕자인 숙부가 있었다. 그는 매우 훌륭한 시를 지을 줄 알고, 성현들의 말씀 중에서도 아이들에게 적합한 가르침을 많이 알고 있었다. 특히 그는 가족 생활의 규범과 부모 형제에 대한 헌신을 강조한 공자의 가르침을 좋아했다.”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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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은 1964년 2월에 쓴 시 <거대한 뿌리>에서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라고 말했다. 1964년 “4월 시평”으로 쓴 <모더니티의 문제>라는 글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시인의 스승은 현실이다. 나는 우리의 현실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을 부끄럽고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그보다도 더 안타깝고 부끄러운 것은 이 뒤떨어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나는 김수영이 ‘(더러운) 전통’과 ‘(더러운) 역사’가 ‘좋다’고 말한 것을, 전통과 역사에 대한 기이한 호고주의 취향에서가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려는 의지 차원에서 풀이한다. 전통과 역사를 직시할 때 시인(작가, 저자)은 시대를 통찰하고 앞서가는 눈을 얻게 된다. 강용흘과 ‘청파’는 이를 자각했으며, 마침내 세상을 자유로이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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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은 우리 전통과 역사를 통해 현실을 직시하는 일의 힘과 의의를 깨닫게 하는 생생한 텍스트다. 《초당》을 교육학 연구를 위한 참고 자료로만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은 너무 편협하고, 어찌 보면 부당하다. 이 작품을 다 읽고 나면 동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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