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명예에 관한 짧은 생각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1974)를 읽고
"모든 '나'에게는 명예가 있다. 이를 인정한다면 이 명제는 다른 모든 '너'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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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작가 하인리히 뵐이 쓴 이야기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읽었다. 뵐은 이 작품의 정체성을 '소설'이 아니라 '이야기'로 규정했다. 작품 말미에 실린 후기 "10년 후"에서 "이 '이야기'가 테러리스트 '소설'이라는 소문"이 있지만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며 "소설도 아니"라고 단언한다.
소설이 '화자(소설가)->청자(독자)'의 일방향성을 지향한다면, 이야기는 '화자->청자, 청자->화자'의 쌍방향적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뵐은 평범한 가정부 카타리나 블룸이 황색 언론과 이에 편승하고 부화뇌동하는 여론에 밀려 살인범이 되는 부조리한 현실을 이야기한다. 이를 통해 청자와 함께 그런 부조리한 현실 경험을 공유하거나 청자로 하여금 현실 경험을 자각하게 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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뵐은 전후 독일 문학의 주요 과제를 "사람이 살 만한 나라에서 사람이 살 만한 언어를 찾는 일"에서 찾았다. 언어가 만드는 폭력은 사람을 손쉽게 규정하고, 이에 바탕을 두고 낙인을 찍으며, 거짓을 진실로 둔갑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독일 제3제국이 유태인을 절멸시키려는 가공할 폭력을 기획했을 때 그들이 심혈을 기울여 추진한 일은 폭력을 미화하거나 대중으로 하여금 오도하게 만드는 명명 작업이었다. 나치는 유태인 인종 말살을 '최종 해결책'이라고 이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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뵐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에서 언어 문제를 어떻게 제기하는가. 소박하지만 자신만의 비범한 삶을 꾸려 가던 젊은 여성 블룸이 사회적 명예와 주변 사람들의 신망을 잃고 살인범이 된 배경은 언론의 폭력이었다.
언론(言論)의 존재 수단은 언어다. 언론은 언어로만 가능하므로, 언론이 조장하고 확대하는 (대개 잘 보이지 않는) 폭력 문제는 언어에서 출발하고 언어를 통해(서만) 절정에 이른다. 뵐은 이런 문제를 카타리나가 경찰 조서를 받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암시적으로 말하고 있다.
"개념 정의를 두고 그녀(글쓴이-카타리나 블룸)와 검사들 혹은 그녀와 바이츠메네(글쓴이-경찰서 수사과장) 사이에 본격적인 논쟁이 벌어졌다." (31쪽)
경찰은 "(글쓴이-카타리나에게 관심을 가진) 신사들이 다정하게 대했다"로 조서에 적었고, 카타리나는 "양쪽이 원하는 다정함이 아니라 일방적인 치근거림이었다."로 수정할 것을 요청했다. 카타리나는 경찰이 자신의 변호사이자 핵심 지지자인 블로르나 변호사 부부에 대하여 "(카타리나에게) 친절한"이라고 조서에 적으려 하자 "선량한"을 고집했으며, 경찰이 "호의적인"이라는 단어로 수정하여 제안하자 "친절과 호의는 선(량함)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며 화를 냈다.
언어는 모든 진실을 담지 못한다. 사실을 온전히 묘사하는 언어는 없다. 모든 언어는 화자와 청자 각각의 사상, 신념, 세계관뿐 아니라 언어 자체의 맥락에 따라 서로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카타리나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민감한 언어적 감수성은, 언어를 이용하여 진실과 사실을 말하고 기록하고 전하는 일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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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는 사회적 삶을 사는 인간을 생존케 하는 핵심 수단 중의 하나다. 모든 '나'에게는 명예가 있다. 이를 인정한다면 이 명제는 다른 모든 '너'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우리 사회 언론의 태도와 많은 사람들의 시각이 카타리나 블룸을 살인범으로 몰아간 1970년대 중반 전후 독일의 음울한 분위기와 너무나도 닮아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유감스럽다. 우리가 만들어 쓰는 언어, 언론이 만들어 우리에게 전해주는 언어의 상당한 부분이 "사람이 살 만한 나라에서 사람이 살 만한 언어"와 거리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