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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국어국문학과에 다니면서 자주 했던 말 중에 “국물도 없는 학과”라는 표현이 있었다.
언어와 문학은 사람에 관한 학문인 인문학의 기본 중 기본이니, “국물” 운운하며 그 실제적인 쓰임새를 논하는 일은 경박하다 못해 천박하다. 그렇지만 세상 많은 사람들이 그런 표현을 쓰고, 그 이면에 담긴 의미에 동조(?)하고 있으니 마냥 무시할 수도 없다.
나는 동기들과 술잔을 기울이다가, 언어와 문학을 사갈시하는 세태를 도저히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을 때 “우린 국물도 없는 학과에 다니는 국문학도”라며 자조하듯 울분을 토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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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물”은 유용(함)의 비유이겠다. 무엇이 유용한 지식이고 무용한 지식인가. 일찍이 버틀런드 러셀이 <무용한 지식과 유용한 지식>에서 이 둘을 구별하려고 시도한 바 있는데, 나는 그 글을 모두 읽고 나서도 그가 풀어 놓은 이야기가 머리와 가슴에 쏙 와 닿지는 않았다.
러셀은 (무용하지만) 진기한 지식은 불쾌한 일을 덜 불쾌하게 만들 뿐 아니라 즐거운 일을 더 즐겁게 만들어 준다고 했다.
그는 복숭아와 살구가 중국 한 왕조 초기에 재배되었다가 인도와 페르시아를 거쳐 기원 후 1세기에 서구(로마 제국)에 당도한 사례를 들었다. 살구가 일찍 익는다고 ‘살구(apricot)’란 말이 ‘조숙한, 발육이 빠른(precocious)’과 같은 라틴어 어원을 갖는데, 어원을 잘못 아는 바람에 실수로 맨 앞에 ‘a’ 자가 덧붙여졌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살구를 더 맛있게 먹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지적 호기심이 많았을 게 분명한 러셀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평범한 보통 사람이 살구 어원의 발달사를 알았다고 무용한 지식론에 찬동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러셀 당신은 그랬다고? 그래서 뭐? 나는 아무 느낌이 없는데?’라고 되묻는다면 러셀 선생도 딱히 그럴싸한 대답을 하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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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실 세상 모든 지식을 ‘무용 대 유용’의 틀거리에 맞춰 재단하기는 힘들다. 국어 교사인 내게 물리 역학 이론은 어렵기만 하고 관심도 주지 않는 무용한 지식이지만, 과학도에게 이 이론은 거의 무한에 가까운 유용성을 함축하고 있는 지식처럼 다가올 것이다.
거꾸로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 같은 시가 공학도에게 무의미한 언어의 나열에 불과한 무용한 지식이라면, 내게는 우리 역사와 전통을 골똘히 생각하게 하면서 주변 사물을 깊이 들여다 보게 하는 태도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대단히 유용한 지식이다.
러셀은 예의 글에서 지식이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특정 정보가 아니라 전체의 시각에서 본 인생의 목적에 관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지식은 인간 특유의 것에 대한 일종의 자부심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이해하고 아는 힘, 도량 있게 느끼는 힘, 올바르게 사고하는 힘을 키운다. 지혜와 통찰을 솟아나오게 하는 힘도 이런 것들에서 비롯될 것이다.
유용한 것은 유용하므로 좋다. 인정한다. 무용한 것은? 나는 무용한 지식이 무용하다는 사실 그 자체가 우리를 부담 없이 즐겁게 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무용한 것들이 주는 즐거움은 무한정이다. 지적 호기심을 충족할 때의 쾌감, 진지한 성찰 끝에 오는 깨달음의 묘미는 우리가 무용한 것들에서 얻을 수 있는 격조 높은 재미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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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현장은 대표적인 공적 담론의 장이므로 지식을 올바르게 분별해 다루는 일이 다른 어느 곳보다 중요하다. 공적 담론에서 유통되는 지식은 그 파급력이나 영향력의 범위가 해당 담론장에 개입하는 참여자들뿐만 아니라 한 사회 전체에도 미치기 때문이다.
교육 담론에서 다루어지는 지식의 종류, 지식들 간의 관계와 위계 구조 여하에 따라 한 사회의 현재와 미래 방향이 결정된다는 점도 교육 지식을 숙고해야 함을 말해 주는 방증이다. 인문학이 무슨 돈이 되냐며 홀대하거나, 인문학도 돈이 되어야 한다며 그 반대 자리의 극단으로 끌고 가려는 사회에서 사고의 균형이나 지혜나 지성이 자리 잡기는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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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거창한 설계 작업에 들어갔을 게 분명한 이른바 반도체 교육이 학교에 적당히 쳐들어 왔으면 싶은 심정으로 이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