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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Feb 14. 2023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는 거다”

《줬으면 그만이지: 아름다운 부자 김장하 취재기》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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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세밑 <경향신문>의 한 칼럼에서 우연히 ‘김장하’라는 낯선 이름을 처음 보았다. 경남 진주에서 한약방을 꾸려가던 사람, 벌어들인 돈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생각을 20대 때부터 한 이후로 한약방 문을 닫는 70대까지 한결같이 약속을 지킨 사람, 마지막 남은 재산을 훌훌 털어 인근 대학교에 기부한 사람, 그러면서 “줬으면 그만이지” 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은 사람. 정말 이런 사람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 만큼 김장하 선생의 행적은 충격 그 자체였다.


얼마 뒤 경남 엠비시(MBC)에서 제작한 2부작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설 직후 인터넷에서 영상을 찾아 전편을 시청했다. 보는 내내 따뜻함과 뭉클함이 밀려왔다.


김주완 전 경남도민일보 기자가 다큐멘터리 방송에 담은 내용을 바탕으로 엮은 일종의 취재기가 《줬으면 그만이지》(도서출판 피플파워)라는 제목의 책으로 새해 1월 1일 발행되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곧장 책을 주문해 읽었다. 표지에 손을 꼭 쥔 채 조금 구부정한 자세로 길을 걷는 김장하 선생의 뒷모습 사진이 담겨 있었다. 평생 자신을 숨기려고 하면서 퍼주는 삶을 실천한 김장하 선생의 정신을 잘 보여 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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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모두 7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에 김장하 선생의 생애를 기록했고, 장학 사업, 학교 설립과 국가 헌납, 공동체 지원 등을 중심으로 하는 베풂의 이야기가 2~4부에 걸쳐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5~7부에서는 김장하의 정신적인 기질, 베풂과 나눔의 철학과 정신을 풀어 놓았다.


김장하 선생의 행적과 일화를 이 짧은 글에 일일이 담아 내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 같다. 40대 초반에 사립 고교(진주 명신고)를 세웠다가 40대 후반에 국가에 헌납한 것과,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장학생들(주로 성적보다는 가난한 집안 형편을 고려하여 선발했다고 한다.)에게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 진주 지역의 정신과 문화를 고양하기 위해 여러 재단 및 문화 예술 단체, 지역 언론 등에 후원을 아끼지 않은 것 등 굵직한 행적들은 칼럼과 다큐와 인터넷 구전을 통해서도 비교적 널리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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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을 읽으면서 김장하 선생의 놀라운 베풂이 어떤 정신과 철학의 바탕 위에 서 있는지 눈여겨 보려고 했다. 김장하 선생은 명신고를 국가에 헌납하고 열흘 뒤 열린 이사장직 퇴임식 인사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본질적으로 이 학교는 제 개인의 것일 수 없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 드렸듯이 본교 설립의 모든 재원이 세상의 아픈 이들에게서 나온 이상, 이것은 당연히 공공의 것이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는 것이 본인의 입장인 것입니다. (202쪽)


돈과 돈벌이에 대한 김장하 선생의 특별한 시선, 곧 돈을 쓰되 공동체와 공공을 먼저 생각하며 쓰는 ‘품격 있는 어른’의 철학이 잘 담겨 있다. 2008년 10월 15일 오후 2시 경상국립대 남명학관 남명홀에서 열린 ‘김장하 명예 문학박사 학위수여식’에서 김장하 선생은 다음과 같은 말도 남겼다. “똥은 쌓아 놓으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어버리면 거름이 되어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 돈도 이와 같아서 주변에 나누어야 사회에 꽃이 핀다.”


김장하 선생의 나눔과 베풂 정신은 반대급부를 바라지 않는다. 줬으면 그만인 것이다. 김장하 선생의 오랜 친구인 최관경 전 경상대 교수는 김장하의 나눔 철학이 한마디로 ‘무주상보시(無住相報施)’라고 했다고 한다.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베풀었다’는 자만심 없이 온전한 자비심으로 베풀어주는 것. 그래서였을 것이다. 김주완 전 기자가 김장하 선생에게 언제 가장 행복했는지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글쎄, 매일 행복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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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장학금을 받아 배움의 길을 걷는 데 도움을 받았다면 훌륭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것이다. 장학금을 준 사람 역시 돈을 받아 쓴 사람이 사회적으로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이겠다. 


김장하 선생의 장학 사업은 이런 평범한 생각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장학금을 받고도 특별한 인물이 못 돼서 죄송하다고 말하는 어느 명신고 졸업생에게 김장하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그런 거를 바란 거는 아니었어.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거다.”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 중)


지난 2월 7일 진주교육지원청에서 열린 《줬으면 그만이지》 출간 기념 김주완 작가 북 콘서트에서 한 진주 시민이 “나는 김장하를 가진 진주에 산다. 이제 뿌리를 내려도 되겠다.”라는 서평을 낭독했다. 품격 있는 한 어른의 존재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을 주는지 이보다 적실하게 표현한 말이 있을까. 그의 멋진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김장하를 가진 대한민국에 산다. 이제 뿌리를 내려도 되겠다.


김주완(2023), 《줬으면 그만이지》, 도서출판 피플파워, 2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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