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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Jun 30. 2022

위험한 책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1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은 1인칭 주인공 홀든 콜필드가 서술자가 되어 이야기를 들려 준다. 홀든의 장래 희망(?)은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는 것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에 관한 이야기는 홀든이 여동생 피비를 몰래 만나는 대목에 딱 한 번 등장한다. 호밀밭은 수천 명의 어린이들이 재미있게 노는 장소다. ‘나’는 그 넓은 호밀밭에 있는 유일한 어른으로, 호밀밭 끄트머리의 절벽 옆에 있다가 앞뒤 생각없이 마구 달리며 놀던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얼른 나타나서 아이들을 구해 준다.


홀든은 성적 미달로 학교에서 제적 처리를 당한 뒤 며칠간 세상을 방황하다가 몰래 집을 방문해 여동생 피비를 만난다. 영민한 여동생은 오빠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직 방학을 하지 않았는데 오빠가 집에 찾아온 것에 의심을 품고 퇴학을 당했음을 직감한다. 피비가 몰아붙인다.


“그럼 뭘 좋아하는지 한 가지만 말해 봐.”


오빠가 몇 가지를 말하지만 성에 차지 않는다.


“그럼 다른 걸 말해 줘. 앞으로 뭐가 되고 싶은 건지 말이야.”


홀든은 ‘호밀밭을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는다면’이라는 노래 제목을 꺼내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피비가 노래 제목이 잘못됐다며 ‘호밀밭을 걸어오는 누군가와 만난다면’(*)이라고 정정한다. 홀든은 그 노래가 영국 스코틀랜드의 민족 시인인 로버트 번스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며 목소리를 높이지만 사실은 그 시를 잘 모르고 있었다.


2


‘호밀밭의 파수꾼’과 그가 하는 일은 상징적으로 보인다. 불안한 10대를 대변하는 전형적인 인물 홀든이 앞으로 되고 싶은 무엇을 묻는 여동생의 질문에 대답하는 말 속에 나오므로 순수한 어린 시절을 간직하고 싶은 마음을 대변하는 소재처럼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비평은 이 책과 같은 성장소설 유의 작품에 기계적으로 적용되는 상투적인 방식이어서 별로 끌리지 않는다.


성적 미달로 학교에서 제적을 당한 뒤 길거리를 배회하는 용기(?)를 낼 수 있는 학생(!)은 그다지 많지 않다. 홀든 이야기의 배경이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불안한 미국 사회였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시대가 불안하면 사람들의 삶과 의식도 불안해지기 십상이다.) 학생 신분인 그가 술집과 클럽과 호텔을 전전하면서 뉴욕 거리를 방황할 수 있었던 것은 (홀든 자신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그만한 경제적 여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홀든이 내뱉는 언어들은 유치하게만 다가올 뿐 어떤 공감의 느낌도 주지 않는다.


불안과 방황은 10대의 숙명이라거나, 어른들이 보기에 유치하게 들리는 언어가 10대 중반 인간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10대 전체를 그런 틀 안에 가두는 것에는 어느 정도로나 동의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불안과 방황과 유치는 힘들게 사는 어른들에게도 언제든 찾아 오는 불청객들이다. 이 책에 대한 상투적인 해석 중 하나로, 주변 사람과 사회를 저격하는 홀든의 태도를 세상의 가짜나 허위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 관점에서 보는 시각이 있는데, 가짜와 허위의 주인공은 (홀든 자신뿐 아니라 작품 속 홀든의 친구들에게서도 발견되다시피) 10대 중반의 인간들에게서도 부지기수로 발견된다.


3


홀든이 순수를 대변하는 인물인 것처럼 해석하거나, 저 위의 비평 사례에서와 같이 과도한 상징법에 기대 ‘호밀밭의 파수꾼’을 감상하는 관점에 마음이 끌리지 않는 까닭은 홀든의 며칠간의 방황이 지나치게 황당무계하기 때문이다. 그의 여정은 무책임하고 무목적적이다. 성적 미달로 제적을 당한 학생에게 무슨 책임이고 목적이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지만 말이다.


아니다. 사실 홀든은 계속 자신의 (학생과 자식으로서의) 책임과 (삶의) 목적을 가슴에 품었을 것 같다. 좀 더 길고 본격적인(?) 가출을 실행하려는 순간 자신을 따라 나서려던 어린 여동생을 만류하려고 결국 가출 결심을 포기하는 것이나, 이후 정신과 병원에서 진료를 받으면서 “학교에 가게 되면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하다가 “열심히 공부할 생각”을 갖는다거나 하는 따위의 것들이 그럴 가능성을 높여 준다.


홀든이 자신의 이야기를 끝내면서, 이야기하는 내내 경멸하고 무시했던 친구들을 그리워했다고 말하는 대목이야말로 홀든의 여정이 과잉 자의식 상태에 빠진 고등 유한 계층 룸펜의 과소비적인 일탈담에 불과하다는 심증을 굳게 만드는 결정적인 근거다. 누구나 홀든처럼 방황하고 배회할 수 있지만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다.


4


나는 비틀즈의 멤버 존 레논의 등에 5발의 총을 쏴 그를 살해한 마크 채프먼이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으면서 경찰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는 이야기나, 케네디를 죽였다고 알려진 리 하비 오스월드가 케네디를 저격한 장소에서 이 책이 나왔다는 이야기 따위를 찾아 읽으면서 그들이 왜 홀든의 이야기에 빠져 들었는지 상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채프먼과 오스월드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의 일부(마지막에 피비 때문에 가출을 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일부’라고 표현했다.)를 결행한 홀든의 현실 확대 복제판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나는 이렇게 위험한 책이 우리나라에서 57만 부나 팔렸다(**)는 말을 듣고 아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 57만 부의 독자들이 홀든의 꿈을 극단으로 좇아 채프먼과 오스월드처럼 살고 싶어 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 도대체 이게 무슨 노래일까 싶어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어린 시절 즐겨 불러 귀에 익은 멜로디가 흘러 나왔다. 좀 더 살펴본 결과 우리나라에 <들놀이>란 제목으로 번안한 동요가 있는, 스코틀랜드의 전래 동요 같은 노래라고 한다. 유튜브에 들어가서 영어 제목 <Comin' Through the Rye>로 검색해 들어 보기 바란다.

(**) 민음사 판 세계문학전집 중 한 권으로 팔린 수량만 57만 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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