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승 외, 《별별 교사들》(교육공동체 벗, 2023)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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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게 “당신의 교육력은 상, 중, 하 세 등급 중 어디에 속한다고 생각하나요?”라고 묻는다. 초보 교사 시절이었다면 주저하지 않고 “상에 속합니다.”라고 답했을 것이다. 그것이 교육자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자세 중 하나라고 믿었다. 실제 그런 마음으로 학생들을 대하고 동료 교사들을 만났다. 내가 중시하는 교육철학이나 교육적인 기준과 다른 관점의 학생과 교사를 보면 설득하여 내 기준에 따르게 하려고 하거나, 그냥 무시했다.
교사 생활 20년을 훌쩍 넘은 지금은 질문 자체가 부적절하다며 대답을 거부할 것 같다. 물론 그사이 학생을 대하고 가르치는 데 밑바탕이 될 만한 경험과 통찰, 시행착오와 성과, 실패와 성공의 기억들이 내게 적지 않을 터이므로 학생들에 대한 교육력에 있어서만큼은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상이 아니라 최상이나 극상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다만 여기에는 조건이 하나 있다. 등급의 절대평가제. 내 교육력 등급이 최상이나 극상이라면 다른 교사들의 교육력 등급 역시 그렇게 보자.
교사들마다 학생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착한(?) 선생님이 있고 안 착한(무서운?) 선생님이 있다. 중고등학교 교사라면 교과 지식에 대한 이해나 인식 수준이 천차만별이다. 가르치는 교사가 있는가 하면, 조언하거나 안내하거나 조용히 거들어 주는 교사가 있다. 이런저런 것들에 대한 감수성이 섬세한 교사 한편에 거칠고 무뚝뚝하고 냉담해 보이는 교사가 서 있다. 나는 이런 모든 교사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학생들은 나뿐만 아니라 이러저러하게 나와 다른 선생님들에게서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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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학교가 다양성의 전시장이자 경연장이 되는 것이 학생과 교사 모두에게 최고의 선물이자 가르침과 배움을 역동적으로 촉진하는 제일의 수단이라고 믿는다. 초보 교사 시절이었다면 결코 생각해 보거나 동의하지 않았을 이런 믿음을, 나는 외국 교육자 두 명이 각기 쓴 책을 읽으면서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조금 길지만 해당 대목을 모두 인용해 본다.
“학교는 모두가 공통적으로 지켜야 할 대표적인 규칙들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동시에 교사들 각자가 자신들만의 스타일로 수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중략) 교사들 내부에서 동료의식을 갖고 연대하며 서로를 지원할 수 있게 하려면, 무엇보다 좋은 교사가 되는 데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수업에서 매우 확고한 태도를 취하는 교사가 아이들의 정신을 망가뜨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자유롭게 행동하는 교사가 학생들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못한다는 생각과 마찬가지로 지극히 부당하다.” - 요하임 바우어(2014), 《학교를 칭찬하라》, 궁리, 74쪽.
“아이들이 언제, 어떤 형태로 커다란 교육적 경험을 할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교사들은 결코 초조해할 필요도 불만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됩니다. (중략) 교사들이 괴로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혼자서 교육하고 있다는 생각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좀더 동료들을 믿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알고 지내는 동료도 있겠지만, 자신과 같은 교사단(faculty)을 구성하는 동료들은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과거에 그 아이를 가르친 선생님, 미래에 그 아이를 가르칠 선생님 등 모르는 선생님들과 같은 교사단을 형성하는 겁니다. - 우치다 타츠루(2020), 《완벽하지 않을 용기》, 에듀니티, 184~1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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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80년대 중반 남자 고등학교에서 군인들처럼 교련복을 입고 단체 행진을 하거나 총검술 훈련을 해야 했던 교육과정을 경험했다. 교실에는 매질과 폭언이 자주 등장했다. 1970년대 말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스타일의 교실 풍경이 그 당시 우리나라 남자 고등학교를 지배한 학교 문화였다.
그 어두운 시간의 터널을 그나마 무사히 헤쳐 나올 수 있게 한 데는 각기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우리를 다르게 가르치려고 했던 몇몇 선생님들의 존재가 있었다. 내가 찾아갈 때마다 정물화의 풍경처럼 말없이 지켜보시기만 했던 백발의 사서 선생님, 연극 예술에서 얻은 에너지를 때때로 수업 중에 열정적으로 풀어 놓곤 했던 국어 선생님, 침묵의 미소로나마 관심과 지지의 끈을 놓지 않았던 미술 선생님 등등.
모르긴 몰라도 그들은 당대 교사 집단의 시각에서 볼 때 비주류이자 아웃사이더이거나 방외인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분들 덕분에 질식할 것 같은 학교에서 숨을 쉬며 지낼 수 있었고, 틀림없이 무지막지했을 3년의 시간을 비교적 무난하게 버텨 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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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공동체벗에서 지난 5월 15일자로 발행한 책 《별별 교사들》을 지난주에 받아 주말 특별 연휴 시간을 이용하여 모두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앞에서 말한 교육력 등급 상, 중, 하에 관한 이야기, 요하임 바우어와 우치다 타츠루의 책 읽기 경험담이 떠올랐다. 학교가 있어야 하는 이유, 교사가 학생들 앞에서 지켜야 하는 태도, 수업의 진짜 목적, 교육하는 일의 의미 등등 교육과 관련된 근본적인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공동 필자 9명이 서로 다른 ‘일대기’에 담아 놓은 교육 서사의 의미가 각별했다. 그것들은 겉으로 한 개인의 이야기라는 꼴을 취하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우리 시대와 우리 사회의 교육과 학교, 학생과 교사를 주제로 하는 다채로운(혹은 다채로워야 할) 초상을 그리고 있었다.
이 초상이 뿌리를 두고 있는 지점은 부제에 잘 드러나 있다. “다양성으로 학교를 숨 쉬게 하는 교사들의 이야기”. 획일적인 입시 경쟁과 성적 경쟁을 지상 최대의 과업으로 여기는 학교에 가장 필요한 이야기가 아닐까. 다양성이 사라진 거대한 전체로서의 학교는 필연적으로 쇠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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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 교사들》을 쓴 9명의 공동 필자 중에는 청각 장애를 가진 교사가 한 분 계신다. 그는 서울 영파여자중학교 교사이자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조합원인 조원배 선생님이다. 나는 그와 동시대 교사단의 하나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고마움과 자부심을 느낀다.
“교사는 자신의 삶으로 아이들을 만나고, 자신의 삶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즉 교사 자신의 삶이 아이들의 교사가 되어야 한다. 열성을 다해 아이들을 만나는가? 그 방법은 정당한가? 정성을 다해 가르치고 배우는가? 아무 준비도 없이 들어서고 아이들을 만나지는 않는가? 학생을 한 사람의 인격으로 존중하며 대화하는가? 아이들에게 그리고 스스로 진솔한가?” - 이윤승 외(2023), 《별별 교사들》, 교육공동체벗, 176쪽.
조 선생님은 위 글을 교무실 책상 위에 30년 넘게 붙여 두고 교직 생활의 나침반이자 이정표로 삼고 계신다고 한다.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한 조 선생님만의 길일 것이다.
요아힘 바우어의 말처럼 좋은 교사가 되는 데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교사라면, 나는 당신이 조 선생님의 방식과 다른 당신만의 방식을 진정성을 갖고 실천해 나가기를 진심으로 기원하고 응원한다. 우리는 모두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의 한 사람이다.
○ 이윤승 외(2023), 《별별 교사들》, 교육공동체 벗, 1만 7천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