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적 책 읽기에 관한 조그만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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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출신의 미국 인지심리학자 스티븐 핑커를 처음 만난 것은 2000년대 중반 무렵 그의 저서 《언어 본능》을 통해서였다. 저자 정보들을 찾아 읽고 책을 구해 몇 장 읽으면서 든 첫 번째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뭐 이런 괴물이 있지?’
놀라운 박학다식에다 학문의 바다는 끝이 없다는 옛말을 책 속 문장들이 펄떡이며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내처 《빈 서판》을 구해 읽으면서 나는 또 한 번 핑커의 저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 연구 분야의 학문적 그늘을 발본색원하려는 끈질긴 태도, 학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려는 야심 같은 것도 느껴졌다.
두 종의 놀라운 책을 읽고 나서 핑커를 ‘믿고 읽는’ 작가 목록에 넣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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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핑커가 쓴 놀라운 책을 한 번 더 만날 기회가 생겼다. 지역 내 선생님들과 함께하는 공부 모임에서 올해 함께 읽을 책으로 핑커의 2011년작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한국어 번역본 2014년 발행)를 정한 것이다.
책값이 6만 원에 이르는 1408쪽짜리 대작을 2023년의 첫 번째 책으로 흔쾌히 결정한 데는 처음 책을 추천한 선생님의 강력한 목소리가 크게 작용했지만 핑커를 ‘믿고 읽는’ 작가 목록에 넣은 내 경험이 작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핑커는 나와 선생님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평소 무슨 책이든 어떤 저자든 쓴소리를 가리지 않는 선생님조차 책에 대한 별다른 지적질(?)을 하지 않으셨다. 나 또한 모임 때마다 침을 튀겨 가며 인상적으로 읽은 대목과 내용을 신나게 재생했다.
그러던 어느날 인터넷에서 책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책 한 권을 만났다. 《우리 본성의 악한 천사》(2023)!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책을 주문했다.
3
핑커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폭력이 감소해 온, 달리 말하면 계몽을 통해 문명화해 온 인류 역사를 인과적인 차원에서 서술하였다. 이는 직전 세기에 양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문명화의 밑바닥을 보았고, 각종 신종 폭력의 세기로 거듭나고 있는 현대를 사는 우리의 통념과 모순되는 논지 전개 방식이다. 책이 더 짜릿하고 재미있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핑커의 톡톡 튀는 문장들은 또 얼마나 경쾌하고 쉬운가.
《우리 본성의 악한 천사》 저자들(17명의 공동 저작이다.)은 핑커를 음험한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그처럼 규정한다. 역사의 인과 관계를 순진하고 낙관적으로 해석하는 핑커의 의식의 배후를 파헤친다. 핑커가 간과하거나 의도적으로 누락하거나 축소하는 폭력의 지점들(유형, 범위, 시대, 지역 등)과 이에 대한 해석을, 이들 저자들은 각자 속해 있는 세부 역사 연구 분야의 최신 성과를 활용하여 논박한다. 기본적으로 신사적이지만 때로는 가열차고 때로는 추상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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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와 《우리 본성의 악한 천사》를 함께 읽으면서 비판적인 책 읽기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나는 스타 작가나 베스트셀러가 하루아침에 벼락 로또처럼 나오는 법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믿고 읽는’ 작가나 영원한 고전 같은 책 역시 없다고 보는 것이 우리의 지성 함양과 정신 수양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책 읽기에서 중요한 것은 깨어 있고 열려 있는 눈이다. 그것이 우리가 제대로 알아 바르게 행동하면서 살 수 있는 조건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