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책찜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은균 Aug 09. 2023

그가 ‘괴물’인 이유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다시 읽으며

1


한나 아렌트가 쓴 문제작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처음 읽은 것은 2015년경이었다. 당시 나는 학교교육에 관한 책 한 권을 내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책의 한 꼭지를 시스템론으로 정해 이런저런 생각과 경험을 정리하다가 아이히만에 관한 이야기를 비중 있게 담기로 하였다. 보통 사람들이 특정한 시스템 안에서 ‘괴물’이 되는 사례로 아이히만을 떠올린 것이다.


2


아이히만은 쇠락한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전기설비회사와 정유회사에서 각각 영업직과 사무직 직원으로 평범한 직장인 생활을 하다가 나치에 가입한 뒤 히틀러를 향한 존경심과 그 자신의 출세욕이 겹쳐지면서 유대인 대학살의 한복판에서 학살 실무를 총괄하는 전무후무한 역사적 전범이 되었다.


아이히만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아르헨티나로 도주해 15년을 숨어 지내다가 1961년 이스라엘 비밀정보기관인 모사드의 요원들에게 체포되었다. 이스라엘로 압송되어 전범 재판을 받게 된 아이히만은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론하였다. ‘명령을 따랐을 뿐이니 무죄이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거나 참회하지 않았다.


아렌트는 재판 과정에 직접 참관하고, 대학살과 소송 관련 문헌 및 기록들을 광범위하게 참조하면서 아이히만을 분석했다. 아렌트는 이렇게 말했다. “그로 하여금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였다.”


3


아이히만은 내면의 양심에 따라 행동했다. 만약 자신이 히틀러 총통이 내린 명령(유대인에 대한 신체적 절멸)을 실행하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히만이 한 일은, 아렌트의 표현을 빌리면 “수백만 명의 유대인 남녀와 아이들을 상당한 열정과 가장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죽음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우리는 즉각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갖게 된다. “죽음의 장부를 담당한 경리”(‘나치 사냥꾼’으로 널리 알려진, ‘용서’에 관한 세계적인 저작인 《해바라기》를 쓴 시몬 비젠탈이 아이히만을 묘사한 비유적 표현)답게 아이히만의 내면은 비정상적인 악으로 가득차 있지 않을까.


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뒤 6명의 정신과 의사들이 아이히만을 면담하고 심리 판정을 하였다. 모두 그가 ‘정상’이라고 판정했다. 그들 중 한 명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적어도 그를 진찰한 후의 내 상태보다도 더 정상이다.” 또 다른 의사의 말은 이랬다. “그의 아내와 아이들, 어머니와 아버지, 형제자매, 그리고 친구들에 대한 그의 태도, 그의 모든 정신적 상태가 ‘정상일 뿐만 아니라 바람직함’을 발견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으면서 정신과 의사보다 정상인 사람, 또는 가족이나 친구에 대한 태도가 정상일뿐더러 바람직한 사람을 역사상 최악의 전범으로 만들어 버린 시스템의 힘이 너무나 무섭게 다가왔다.

  

4


최근 나는 여름 방학을 맞아 시간적인 여유를 두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다시 읽었다. 8년 전 첫 번째 읽기를 할 때에는 악의 평범성이나 무능의 3단계론(생각의 무능→말하기의 무능→행동의 무능) 같은 아렌트의 주요 논지들이 어떤 과정이나 근거를 통해 도출되었는에 집중하며 읽느라 아이히만 당대의 독일 사회나 유대인 사회의 이면을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


아렌트는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나치의 대유대인 정책이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변화했고, 그러한 과정을 추동한 내부 동인이 무엇인지를 자세히 분석하였다. 강제 추방과 이주 정책을 거쳐 전멸책에 이르기까지 계속 바뀌어 온 유대인 정책이 어떤 결과, 또는 효과를 냈는지 살핌으로써 아이히만 자신이, 그리고 독일 사회 전체가 어떻게 악의 심연으로 서서히 침몰해 갔는지를 샅샅이 추적해 보여주었다.


대부분의 독일 유대인들은 나치에 저항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힘없고 평범한 유대인들을 강제 추방 이주, 수용과 학살의 현장으로 보내는 데 유대인 조직들과 상류층 유대인들이 있었다. 총통의 최종 해결책 명령이 내려지자 엄청난 양의 법규와 지시가 담긴 공문서들이 행정가와 전문 변호사와 법조인들에 의해 만들어져 쏟아져 나왔다. 아렌트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합법성의 외관이, 독일 사람들에게서 양심에 반하는 범죄의 공범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저항 의식을 앗아가 버렸다고 비판했다.



5


아이히만의 이야기는 지나간 시절의 역사적인 교훈담일 뿐인가. 아이히만은 사형 선고를 받게 될 마지막 법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괴물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만들어졌을 뿐이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행한 일이 양심과 법적 의무에 따른 것이었으므로 무죄라고 생각했다.


나는 시스템(제도, 명령, 법규)의 권위에 기대어 자신이 행한 범죄적 행위에 대하여 무죄임을 주장하는 현대의 또 다른 아이히만들이 도처에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 내린 가상의 평결문이 이들 현대의 아이히만을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피고는 피고의 이야기를 불운에 찬 이야기로 만들어 들려 주었습니다. (중략) 논증을 위해서 피고가 대량학살의 조직체에서 기꺼이 움직인 하나의 도구가 되었던 것은 단지 불운이었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피고가 대량학살 정책을 수행했고, 따라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구를 유대인 및 수많은 다른 민족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기를 원하지 않는 정책을 피고가 지지하고 수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누구도, 즉 인류 구성원 가운데 어느 누구도 피고와 이 지구를 공유하기를 바란다고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교수형에 처해져야 하는 이유, 유일한 이유입니다.”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382쪽.
매거진의 이전글 ‘뭐 이런 괴물이 있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