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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Jun 21. 2023

내 믿음이 진실의 전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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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캐나다 출신의 세계적인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의 역작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2014, 사이언스 북스) 제1장 ‘낯선 나라’를 읽다가 새삼 놀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공포심이 일게 만드는 과거 인류의 폭력적인 모습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내가 특히 놀란 은 극악한 폭력을 대하는 당시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무시무시한 죽음을 상기하는 십자가형을 기꺼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사지가 꿰뚫리는 고통 속에서 서서히 질식해 죽어 가게 하는 십자가형이 하느님이 세상에 베푼 가없는 호의라고 생각했다. 이 가학적 살인이라는 자비의 선물 덕분에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논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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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이런 관점에 따르면 십자가형이나, 중세 시대 마녀들에 대한 극악한 고문들은 하느님에게로 향할 수 있는 구원의 길이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최초의 기독교 성인들은 극렬한 공포와 고통을 동반한 처형 방식을 통해 죽음으로써 하느님의 곁에서 쉴 자리를 얻었다고 한다. 예수의 사도이자 성 베드로는 물구나무 자세의 십자가형이, 스코틀랜드 수호성인인 성 안드레아는 엑스(X)자 십자가형이 수단이었다.(영국 국기의 대각선 줄무늬가 여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성 라우렌시오에게는 석쇠구이형이, 성 카타리나에게는 바퀴형이 주어졌다. 성 라우렌시오는 못 말리는 마조히스트였을까. 자신을 굽는 석쇠에 누운 채 고문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쪽은 다 익었으니 뒤집어서 한 입만 먹어 보시오.
 

기독교 성인전의 관음적인 고문 묘사는 고문에 대한 분노를 끌어내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성인들의 용기에 대한 존경을 끌어내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예수에게 십자가형이 그랬던 것처럼 성인들에게 고문은 잘된 일이었고, 환영할 조치였다. 현세의 고통에 대한 대가로 내세의 지복이라는 보상이 주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시인 프루덴티우스는 한 성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 어머니도 참석하여 귀한 자식의 죽음이 준비되는 과정을 죄다 보았다. 그녀는 비탄한 기색을 보이기는커녕 올리브나무 장작 위에서 냄비가 쉿쉿거리면서 자식을 굽고 그슬릴 때마다 오히려 반색했다.” (53~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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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성인들의 도저한 가르침을 받은 기독교인들이 고문을 제도화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귀결이었을 것 같다. 핑커는 기독교의 제도적 고문의 논리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천벌을 받는다고 정말로 믿는다면, 그런 사람을 고문하여 진리를 인정하게끔 만드는 것은 오히려 일생의 호의를 베푸는 일이다. (중략) 그가 남들까지 타락시키기 전에 입을 막는 것, 그를 본보기로 삼아 다른 사람들을 억제하는 것은 책임감 있는 공중 보건 조치인 셈이다. (56쪽)     


15세기에서 18세기까지 마녀로 몰려 화형당한 여성 수는 10만 명이었다고 한다. 그중에는 평소 꼴보기 싫었다거나, 자기 남편을 은근한 눈길로 바라보았다는 등의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고발당해 화형을 당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마녀 화형이라는 제도적 고문의 이면에는 기독교의 도덕 윤리와 책임 의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현대의 기독교도들이 고대와 중세 기독교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잔학한 고문과 처형을 신봉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핑커도 비폭력과 관용이라는 현대적 규범을 존중하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자비로운 위선”을 우리가 마땅히 고맙게 여겨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나는 저 ‘위선’이라는 단어에 계속 눈길이 간다. 때로 게걸스럽고 때로 탐욕스러워 보이는 기독교의 해외 선교나 길거리 전도 활동이 그 위선의 이면에 자리 잡은 폭력적인 측면을 감추고 있는 듯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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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믿음이 진실의 전부가 아니다. 이 자명한 진실을 망각하고, 우리는 자신의 믿음을 알지 못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 이들을 안타깝게 여긴다. 그들에게 크게 화를 내거나, 내가 떠받드는 믿음을 받아들이라고 일방적으로 강요한다.     


만약 믿음이 선악이나 정의 불의 같은 가치 평가의 영역과 관련된다면 상대를 향한 감정 표현과 설득의 수준이나 강도가 높아진다. 상대가 내 믿음의 허점 사이를 빈틈없이 파고드는 이성적인 회의주의자라면 분노나 비난이 더욱 커진다. 상대를 바꾸고야 말겠다는 의지 역시 이에 비례한다.      


그 끝은 폭력이자, 나와 너 모두의 괴멸이다.     



* 배경 사진은 성 라우렌시오의 순교 장면을 그린 그림(티치아노, 1564~1567)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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