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담임 편지
1
안녕들 하신지요. 유월 초여름의 빛나는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껴 볼 새도 없이 장마철에 접어들었습니다. 몸과 마음이 온전한 제동 장치 없이 급한 내리막길로 내리닫기 딱 좋은 요즘입니다. 일과 휴식, 집중과 이완이 적절한 경계를 사이에 두고 조화와 균형을 이루었으면 합니다.
2
현두자고(懸頭刺股)
새끼줄로 상투를 대들보에 걸어 매고 송곳으로 허벅다리를 찌르며 졸음을 쫓는다는 뜻으로, 학업에 매우 힘쓴다는 뜻의 한자어입니다. 옛날 선비들의 고색창연한 학업 태도를 이만큼 감각적으로 묘사한 말도 없을 것 같습니다.
고교 시절 저는 이 말을 누런 갱지에 굵은 사인펜으로 써 자취방 책상 바로 앞 벽 위 눈에 잘 띄는 곳에 붙여 두고 마음을 다잡곤 하였습니다. 기억을 떠올려 보면, 국어 고전 수업을 담당하셨던 연세 지긋한 선생님에게 이 말을 전해 들은 것 같습니다. 졸음이 몰려와 고개를 주억거릴 때마다 상투머리를 휙 낚아 채는 대들보의 줄과 부드러운 허벅지를 파고드는 날카로운 송곳의 이미지에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저는 졸음이 찾아올 때마다 이 말을 보며 머리카락을 쥐어 뜯고 손톱으로 허벅지를 세게 꼬집었습니다.
그렇게 애면글면 준비하지만 시험 결과가 항상 만족스럽게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책상 벽 위에 그럴싸한 좌우명처럼 한자 네 글자를 새겨 붙여 두고 스스로를 독려하려고 노력했다는 사실, 그렇게 무엇인가를 위해 열심히 준비하는 과정을 경험했다는 사실은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가슴에 남아 진한 자양분이 되고 있습니다.
1차고사 즈음해서도 그랬지만, 최근 저는 몇 번의 조회와 종회 시간에 우리 반 학생들에게 2차고사 준비를 하면서 경험하는 과정 그 자체에서 보람과 의미를 찾는 시간을 가지라고 강조했습니다. 건조한 수치로 표시되는 시험 점수나 등수도 중요하지만, 시험 준비 차원에서 계획을 세워 이를 실천하면서 만나게 되는 감정과 생각, 낱낱의 시간 경험이 우리 몸과 마음에 더 큰 흔적과 자극을 준다는 말을 곁들였습니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 올 때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어 보는 경험, 졸음이 걷잡을 수 없이 몰려 올 때 곧장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찬물을 들이켜거나 고개를 좌우로 돌리면서 잠의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쳐 보는 경험, 그렇게 최선을 다했음에도 목표한 만큼의 흡족한 결과를 얻지 못했을 때의 실망감을 새로운 노력의 디딤돌로 삼아 보는 아픈 경험 들은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3
몇 년 전 우리 집 아이들에게 “이놈의 새끼들이”로 시작하는 말 몇 마디를 내뱉었다가 곤혹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둘째와 셋째가 ‘어쩔티비’, ‘크크르삥뽕’ 같은 유치한 어린이 유행어를 주고받으며 말다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소리치듯 말했습니다. 초등학생 막내가 사뭇 진지한 표정과 말투로 되묻더군요.
“아빠는 왜 우릴 새끼라고 해요?”
막내의 도전적인(?) 말에 감정이 타올랐습니다. “아빠 엄마 자식이니까 새끼라고 하지.”라며 몇 마디를 내뱉었습니다만 막내는 이미 팩 토라져 제 방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언어 논리로만 보면야 제 말에 틀린 것은 없습니다만 막내가 그런 것을 생각했을 리 없지요. 아이는 그때 제 마음에 뜨겁게 자리하고 있던 타박과 꾸중의 메시지를 직감적으로 깨달았을 것입니다.
4
관계의 역설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가족이나 친구처럼 가까운 사람에게 가깝다는 이유로 말을 함부로 하여 멀어지는 경험을 자주 합니다. 자기 자녀라고 ‘이놈의 새끼’라는 비속어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저는 그 뒤 한참 동안 막둥이와 서먹하게 지냈습니다.
관계의 역설에 빠지지 않는 역설의 언어 표현을 생각합니다. “나와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조심스럽게 말하라.” 학기 초부터 우리 반뿐 아니라 국어 수업을 하는 1학년 모든 학급에 들어가 여러 번 반복해서 말했던 메시지입니다.
학생들이 서로 친하고 가깝다는 이유로 서로를 멋대로 규정하고 함부로 말을 함으로써 상대를 힘들고 아프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학생들에게 친구에게 어떤 말을 장난 삼아 건네고 싶거나 대화 중 갈등의 상황에 휘말릴 것 같을 때 3초를 기다려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말하라고 가르칩니다.
앞으로는 자녀가 성에 차지 않는 행동을 하거나 말을 할 때 “너 또 왜 그러냐?”라고 직설적으로 말하지 말고 “나는 네가 그런 행동과 말을 해서 마음이 아프구나.”라고 ‘나(I)-전달법’을 써서 말해 보면 어떨까요. 때로 속이 터지고 때로 민망함에 닭살이 돋을지 모르지만, 아이들은 어른들의 그런 조심스러우면서도 솔직한 의사 표현 방법을 접하면서 말하기와 인간 상호작용의 중요성을 자연스럽게 깨달을 것입니다.
저도 학교와 교실에서 더 노력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23년 6월 23일 금요일 오후에
담임 정은균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