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이초 1학년 선생님의 죽음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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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학년도 학교폭력 전담 일을 맡고 있을 때였다. 그 해 제1호 사안은 관련 학생 중 피해를 주장하는 학생 측에서 선임한 변호사가 접수했다. 말쑥한 차림의 중년 남성이 건네 준 얇은 쫄대 파일에 내용 확인서와 접수 사유서 등의 문건들이 두둑히 끼워져 있었다.
학교폭력 일을 맡은 지 두 번째 해였고, 첫 해에 처리한 사안들 중에도 악성으로 볼 만한 게 없었다. 나름 자신감이 생겨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훤칠한 양복에 넥타이를 맨 남자가 건네는 변호사 명암을 받고 가슴이 내려앉지 않을 수 없었다. 예의 변호사는 대화 말미에 차분한 목소리로 경찰 신고와 고소 등의 말을 꺼냈다.
면담을 마치자마자 부랴부랴 교장실로 달려갔다. 교장 역시 변호사와 나눈 이야기를 공유하는 내내 나처럼 긴장한 눈치가 역력했다. 각자 속해 있는 교원단체(나는 전교조, 교장은 교총 소속이었다.)를 통해 도움을 받을 만한 경로를 알아보자고 했다. 교장실 문을 닫고 나서는 내 머릿속에 앞으로 펼쳐질 갖가지 상황들이 스쳐 지나갔다. 경찰 전화, 학부모 항의, 소환 조사, 언론 보도, 검찰 출석 요구 등등.
그 일은 다행히 용두사미(?)로 끝났다. 사안을 조사해 보니 가·피해가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 학교 심의 과정 후 교육청 재심까지 거는 약간의 우여곡절(?)이 이어졌지만 그 뒤로 상황이 더 꼬이지는 않았다. 법률 전문가인 변호사가 접수한 사안치고는 싱거운(?) 결말이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학생이나 보호자가 아니라 변호사가 직접 사안을 접수한 것이 차라리 잘 될 것처럼 느껴졌다. 온몸에 부정적인 에너지를 잔뜩 품고 오는 가해 관련 측 학생이나 보호자와 달리 적어도 변호사는 규정이나 법률 절차 등을 지키는 일에 더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더 솔직히 말한다면 온갖 부정적인 기운을 잔뜩 발산하는 학생이나 보호자를 응대하기가 훨씬 더 힘들고 까다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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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1학년 교실에서 죽음을 맞은 교직 경력 이년차 선생님의 비극 뒤에 학생 생활지도 사안에 문제제기를 했던 학부모 몇 명이 자리 잡고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서울교사노동조합에 제보한 동료 교사들의 증언 중에는 학부모가 했다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알지? 나 변호사야.”
신문 기사 표제에도 오른 이 문장을 읽고 모골이 송연해졌다. 가령 학부모의 위임을 받아 민원을 제기하는 변호사는 당사자성이 상대적으로 약해지므로 교사 입장에서 상대하기가 수월하다. 그런데 학부모가 변호사이거나 고위직 공무원이라면? “나 변호사야.”라는 문장을 내뱉은 예의 학부모 앞에 선 젊은 선생님을 떠올려 보았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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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 장관과 몇몇 곳의 교육감들은 학생 인권이 과도하게 강조되면서 교권이 추락했다는 따위의 퇴행적인 발언들을 쏟아내고 있다. 나는 학교 민원 창구의 단일화와 명문화만으로도 작금의 ‘학부모 갑질 민원’의 폐해를 어느 정도는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법률적인 근거가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몇 년 전(2020년 1월)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참교육실천대회 학교학회 분과 마당에서 집담회를 연 뒤 정리한 내용을 참고 삼아 올린다.
■ 학교 민원 처리 기구(가칭 ‘학교민원조정기구’) 설립과 운용 시스템 마련을 위한 제안서] ■
[제안자] 000
[제안일] 2020년 0월 0일(0요일)
1. 이유
현재 우리나라 학교는 민원을 공공적이고 교육적인 차원에서 처리할 수 있는 합리적인 기구나 절차를 마련해 두고 있지 않다. 이에 학교 민원을 원만하게 처리하기 위한 조정, 중재 기구로서 가칭 ‘학교민원조정기구’의 설립과 운용 시스템을 마련할 것을 제안한다.
2. 목표와 방향
가. 학교 안팎의 교육 주체들 간 합리적인 의견 개진과 의사소통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함.
나. 학교 민원을 헌법이나 관련 법령에서 규정하는 교육의 전문성과 자주성, 교육활동과 학생지도에 관한
교원의 전문적 역량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처리하기 위함.
다. 학교 민원 중재 기구는 민주적인 학교자치의 철학과 관점에서 설립, 운용하도록 함.
라. 학교 민원 처리 과정과 결과가 우리나라 공교육의 근본 정신과 목표를 확인하고 신장하는 데 기여하도록
함.
3. 내용
가. 학교 민원 중재 기구의 설립
1) 명칭: 학교민원조정기구(가칭)
2) 성격: 학교 민원 처리와 조정, 중재를 위한 자치 기구
3) 기능: 학교 민원 처리 과정의 의사결정 일정 조율과 결정, 민원 관련 대상자 간 대화 중재, 민원 처리
관련 회의 진행과 결과 도출, 민원 처리 결과 내용 통보
4) 구성: 3~5인의 교원(당연직 위원 교감 포함)
5) 위원 선출: 단위학교 교원이 추천하고 학교 내 공식적인 의사결정 기구(교무회의, 교직원회의 등)에서
민주적인 방식을 통해 선출함.
* 업무부장, 학년부장 등 교사 그룹 대표 들이 관행적으로 위원으로 추천, 선출되지 않도록 주의한다.
* 의사결정 과정의 효율적 진행을 위해 호선으로 대표나 간사를 선출할 수 있다.
나. 학교 민원 중재 기구의 운용
1) 최초 민원 접수자가 관련 사안을 대표(간사)에게 통지한다.
* 민원 신청은 소정의 서면 양식 사용을 원칙으로 한다.
2) 대표(간사)가 사안의 구체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민원 대상 교원에게 민원 접수 사실을 알린다.
3) 대표(간사)가 민원 중재 기구 위원들과 민원 사안의 적부와 경중을 판단하는 1차 협의를 진행한다.
필요 시 민원자와의 추가 조사(전화, 대면)와 민원 대상 교원과의 대화 시간을 갖고 사실을 객관적으로
확인한다.
4) 1차 협의 결과에 따른 상황별 조치
(가) 민원 대상 교원의 비위 사실이 중대하거나 명백하다고 판단하는 경우: 상급기관인 교육청에
보고하여 정식 조사를 요청한다.
(나) 민원 대상 교원의 경미한 과실이 인정된다고 판단하는 경우: 민원 대상 교원에게 주의나 경고
조치를 취하고, 그 결과를 민원자에게 통보한다.
* 민원자가 결과에 불복할 시 교육청 민원 신청 절차를 안내하고, 민원 대상 교원이 불복 시 민원
중재 기구 대표(간사)를 통해 재심을 요청한다.
(다) 민원이 사실이나 정보의 왜곡, 과장에 따른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하는 경우: 민원자와 민원
대상 교원 간 대화 모임 일정을 결정해 양측에 전달한 뒤, 민원자, 민원 대상 교원, 학교 민원 중재
기구 대표(간사)가 참석하는 대화 모임을 진행한다.
* 대화 모임은 최초 민원 접수 시점으로부터 최소 3일(최대 5일) 이내에 열도록 한다.
* 대화 모임 후 민원자가 결과에 불복할 시 교육청 민원 신청 절차를 안내한다.
(라) 근거 없는 음해성 투서에 따른 민원, 비실명 민원, 전화 민원의 경우: 기각하거나, 필요 시 정식 민원
신청 절차를 안내한다.
5) 학교 민원 중재 기구의 운용 원칙
(가) 민원 처리 시 상호 실명 명기를 원칙으로 한다.(비실명으로 신청하는 민원은 정식으로 접수하거나
처리하지 않는다.)
(나) 민원 처리 결과는 2주일 이내에 민원인에게 서면으로 통보한다.
(다) 민원 처리 과정과 결과가 공정하고 투명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모든 협의, 회의, 대화 모임 시
회의록을 작성한다.
(라) 학교 민원 중재 기구의 협의, 회의와 민원자-민원 대상 교원 간 대화 모임 시 교사의 교육활동이나
학생지도에 관한 법률적 근거(<헌법> 제31조 제4항, <헌법> 제31조 제6항, <교육기본법> 제5조
제2항, <교육기본법> 제14조 제1항, <교육공무원법> 제43조 제1항)와 권한에 의거하여 교육의
전문성과 자주성, 교원의 전문가적 지위나 책임성이 훼손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유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