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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님,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요. 유례없이 길고 강하게 이어진 장마에 별다른 탈 없으셨기를 기원합니다. 저는 여름방학 시작하고 첫 한 주를 보내는 동안 2학기 교육활동 계획과 동료 교사들과의 공부 모임, 후배 교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 등을 하며 바쁘게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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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어떤 책을 읽다가 밴티지 포인트(vantage point)라는 말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밴티지 포인트는 어떤 대상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지점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합니다. 영어 사전을 찾아보니 관점, 입장, 전망이 좋은 지점 등의 뜻이 있었습니다. 어떤 대상의 전모를 탐색하는 데 활용하면 적절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읽고 있던 책은 학교 자치를 주제로 하는 책이었습니다. 전라북도 초·중·고교 선생님들이 꾸려 만든 연구 모임에서 지난달부터 함께 공부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특정 학교에서 자치가 얼마나 현실적이고 실제적으로 이루어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밴티지 포인트가 의사결정이라고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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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공감했습니다. 저는 평소 학교에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의사결정 절차가 마련되어 있으며, 학교 구성원들이 내부 회의나 토론을 거쳐 결정한 사항을 얼마나 존중하고 따르는지 등이 학교교육의 참모습을 좌우하는 측면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밴티지 포인트라는 표현을 활용하여 생각 연습을 조금 더 해보았습니다. 우리 학교 언어 문화의 밴티지 포인트가 무엇일까.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인간관계는 어떤 밴티지 포인트에서 이해하는 것이 효과적일까. 내 교육관이나 학생관, 수업관의 핵심을 보여주는 밴티지 포인트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런 질문들을 앞에 놓고 천천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교사와 학생들이 교무실이나 교실에서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언어 표현들, 보이지 않는 선들을 경계로 계속 이어지거나 끊어지면서 변화하는 우리 반 학생들의 상호작용, 교사 생활 24년 동안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바꾸거나 버리지 않으려고 다짐했던 몇몇 생각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여러 질문과 생각 사이를 오가는 낱말 하나가 있었습니다. 신뢰였습니다.
교육을 매개로 만나는 사람들이 서로 신뢰를 갖지 않으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요. 각자의 감정과 생각을 최우선 순위에 놓고 상대방을 재단하려 들지 않을까요. 교육의 힘과 가능성, 학생의 변화와 성장 등에 관한 공통의 관념도 갖기 힘들 것입니다. 모두 똑같이 교육을 말하면서 행동하지만 각자가 나아가는 방향은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그 결과는 교육의 폭망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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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공적인 일입니다. 사회 속의 자연인(루소), 개인 경험의 재구성(듀이), 공적 제도로의 입문식(피터스) 등 현대적인 교육의 철학적 기반을 다진 대표적인 교육철학자들이 내세운 교육 개념들 속에는 교육이 개인적이거나 사적인 욕망의 추구나 치부와 출세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됨을 웅변하는 내용들이 즐비합니다.
가정 내에서 이루어지는 가정 교육, 학원이나 과외처럼 영리 목적 위주로 실시하는 사교육 역시 교육이라는 범주에 속하는 이상 공적 활동으로서의 교육의 본질과 무관하거나, 그것에서 이탈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순간 그것은 교육이 아니라 기술이나 기교를 습득하는 훈련 정도의 활동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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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교육은 공교육을 대표합니다. 우리나라 공교육의 지상 목표는 민주 시민 양성입니다. 우리나라 국가교육과정에서 그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학생들이 지금 여기에서 시민으로 살아가는 경험을 통해서야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에 관한 이론, 시민성에 관한 지식이나 정보만으로는 실현하기가 요원한 목표입니다.
신뢰가 민주 시민을 양성하는 학교교육의 밴티지 포인트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데 핵심이 되는 시민성은 상호 신뢰에 따른 협력과 협조 시스템 아래서 키워집니다. 시민성이 키워짐에 따라 상호 신뢰 구조는 더욱 강화됩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신뢰 구조가 터를 잡게 되면, 그때부터는 신뢰가 신뢰를 부르는 선순환 사이클 속으로 들어갑니다.
신뢰는 재물이 계속 나오는 보물단지인 화수분과 비슷합니다. 돈과 같은 경제적이고 물적인 자본과 달리 신뢰와 같은 무형의 사회적 자본은 아무리 써도 줄어들거나 없어지지 않습니다. 거꾸로 신뢰나 협력과 같은 사회적인 자본은 쓰면 쓸수록 더 강해지고 굳건해지고 많아지는 신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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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하게도 우리나라는 갈수록 신뢰를 잃어버린 사회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신뢰 지수는 2013년 95위에서 2023년 107위를 기록하며 10년간 12단계나 하락했다고 합니다. 2023 영국 싱크탱크 레가툼 세계번영지수를 참조하여 한국경제연구원이 분석한 결과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동아시아-태평양 18개 국가 중 사회적 자본 지수가 15위로 최하위권이었습니다. 공적 기관에 대한 신뢰 지수는 조사 대상 167개국 중 100위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신뢰(사회 자본) 외의 여러 지표들(개인의 자유, 국가 행정, 투자 환경, 자연환경, 교육, 보건, 생활환경, 경제의 질 등)을 종합한 지수인 세계 번영 지수는 29위로 꽤 높게 나왔습니다.
한편 통계청이 지난해 발간한 ‘국민 삶의 질 2021 보고서’에 따르면 일반적인 사람에 대해 ‘믿을 수 있다’는 사람의 비율을 뜻하는 대인 신뢰도가 2020년 50.3%였습니다. 그 1년 전인 2019년의 대인 신뢰도가 66.2%였으니 1년 만에 다른 사람을 못 믿는 정도가 15.9%포인트나 빠진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전하는 기사(<매일경제> 2023년 7월 24일 자 ‘“둘중 한명은 못믿을 사람”…중국·필리핀에도 밀린 한국 신뢰지수’) 제목에는 “둘 중 한 명은 못 믿을 사람”이라는 서늘한 표현이 들어 있었습니다. 기사를 읽으면서 모래성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번영 국가 이미지를 떠올렸다면 제가 지나치게 예민한 탓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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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울 서이초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을 접하면서 교육 주체들 간의 신뢰 문제를 생각해 봅니다. 무엇보다 서이초 사건이 교육의 본질과 올바른 교육철학에 바탕을 둔 공교육의 목표와 방향을 돌아보는 아픈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큽니다. 이와 더불어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진짜 신뢰를 만드는 시스템과 제도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칸트의 말마따나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듭니다.
찌는 듯한 무더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습니다. 몸과 마음 잘 챙기시길 바란다는 인사 말씀 전하면서 글을 마칩니다.
2023년 7월 27일 목요일
군산영광중학교 1학년 1반 담임 교사 정은균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