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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Jun 19. 2023

“살구 어떻게 따는지 알아요?”

1

     

지난주 목요일 저녁쯤이었다. 아내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살구 어떻게 따는지 알아요?”     


뜬금없는 질문이어서 가만히 아내 얼굴만 바라보았다. 아내가 말을 이었다.     


“이번 주말에 시골 가면 올해 처음 열린 살구 따잖아요.”     


아내는 지난봄 삼 년 전 심은 살구나무에 열매 두 개가 맺힌 것을 보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시골 갈 때마다 밭으로 쪼르르 달려가 녀석들이 날이 다르게 커 가는 모습을 지켜보더니, 크기가 아기 주먹만 해지는 걸 보고 몇 번이나 환호작약하였다.     


매실 수십 그루를 사면서 주인에게 ‘보너스’로 받은 개량종 살구나무였다. 주렁주렁 커다랗게 매달리는 실과류를 유난히 좋아하는 아내 눈에는 돈 주고 산 매실나무나 감나무보다 이 살구나무가 더 예쁘게 보이는 듯했다. 벌써 아내는 아기 주먹만 한 살구가 주렁주렁 매달린 몇 년 후의 살구 가지를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가 따야 한대요. 아주 커다란 자루나 봉지에. 그래야 나중에 열매가 많이 열린대요.”     


나는 실소가 나오려는 것을 참고 누가 그러더냐고 물었다. 아내 표정이 너무나 진지했다.     


“건넛집 ○○ 어머니가 엄마에게 그랬대요.”     


몇 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시골 고향 집이 완전히 비게 되자 광주에 사시는 장인 장모께서 텃밭을 가꾸신다며 시골집을 오가고 계신다. 그사이 장모님과, 나의 동네 후배인 ○○의 어머니는 서로 절친한 말동무가 되었다. 올해 처음 열린 살구 이야기가 나오자 동네 토박이이자 농삿일에 관한 한 모르는 것 빼고 모든 것을 다 아는 ○○ 어머니가 근엄하게 훈수를 둔 저간의 소종래였다.     


“적당히 해야지 말이야. 장모님이나 당신이나 기독교인이라면서 그런 미신을 믿어?”     


나는 적당히 조롱기를 섞어 아내에게 말했다. 아내가 지지 않고 대꾸했다.     


“어떻게든 많이 열리면 좋잖아요.”     


2     


그 다다음날인 토요일이었다. 아내가 일방적으로 정한, 살구 따기로 한 날이 밝았다. 나는 아침을 먹고 집 뒤 언덕바지에서 집 쪽으로 야금야금 쳐들어 오는 왕죽과 조릿대를 서너 시간 동안 쳐 냈다. 일을 끝내고 나자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점심을 먹고 곧장 방바닥에 뻗어 버렸다. 나는 잠속에 빠져들면서 조금 있다가 살구 따러 오라는 아내 목소리를 어렴풋이 들었다.     


한참 뒤 전화기 울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받아 보니 아내였다. 부추를 뜯어야 하니 조그만 칼 하나를 들고 밭으로 오라고 했다. 늘어지게 잠을 자서인지 몸이 조금 가붓했다. 감나무밭 한쪽에 만들어 놓은 부추밭으로 가 아내와 함께 부추를 뜯고 나왔다. 아내가 한쪽 감나무 아래에 세워 둔 하얀색의 커다란 마대 자루를 치켜들고 보란 듯이 내 얼굴 쪽으로 들이밀었다. 짐짓 뭐냐고 물었다.     


“살구예요. 당신이 안 와서 아빠가 땄어요.”     


아내가 마대 속을 보여 주며 싱글벙글 웃었다. 샛노랗게 잘 익은 살구 두 개가 커다란 마대 속에 놓여 있었다. ○○ 어머니가 알려 준 속신(俗信)이 장모님과 아내를 거쳐 결국 평생을 예수님밖에 모르고 사시던 장로 출신 장인 어른에게 강력하게 전해진 것이었다.      


3     


그예 나는 픽 웃고 말았지만 세 사람의 진지함 속에 담긴 간절한 소망들이 느껴져 살구가 든 마대 속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셋이 나무 앞에 오종종 모여 커다란 마대 자루에 살구 두 개를 따 담으면서 연출했을 엄숙한 분위기가 단지 속신에 대한 믿음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실과는 사람이 땀 흘려 가며 애써 가꾼 보람의 결정체일 테다. 옛사람들은 남자든 여자든 누군가 처음으로 그것을 딸 때는 일정한 격식을 갖춰 정성을 들이는 것이 온당하다고 여기지 않았을까.     


기실 남자가 큰 자루에 첫 실과를 따 담으면 계속 풍작이 들 것이라는 믿음 한편에는 남자가 나무 가꾸기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규율이 담겨 있는지 모른다. 과거 농경 사회에서 외부 노동의 핵심 주체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기 때문이다.     


4


그날 저녁 우리 네 사람은 잎꾼개미가 나뭇잎을 갉아 대듯 살구 반쪽을 조심스레 조금씩 베어 먹으며 마음속으로 미래의 풍작을 경건하게 기원하였다. 나는 내 몫으로 전해진 살구 반쪽을 입에 넣어 천천히 저작하면서 ○○ 어머니 발 속신에 담긴 깊은 뜻(?)을 새기지 않고 미신이니 뭐니 하며 폄하하기에 바빴던 나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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