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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May 31. 2023

“선생님, 저희를 좋아하세요?”

6월의 담임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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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7교시 학교 상담실에서 주관하는 표준화 검사를 실시하던 중이었습니다. 우리 반 한 학생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저희를 좋아하세요?” 난데없는 질문이어서 0.1초간 당황했습니다만 얼른 “갑자기 왜 그러냐. 당연히 좋아하지.”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다른 학생이 검사지에 그런 질문이 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검사지에 포함되어 있는 90여 개의 문항 중에 아마 “담임 선생님이 나를 좋아한다”라는 문항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문항에 대해 ‘매우 그렇다, 그렇다’ 따위의 선택지 5개 중 1개를 골라야 하는데, 맨 처음 질문을 던진 학생은 제가 우리 반 학생들을 정말 좋아하는지, 좋아한다면 얼마나 좋아하는지 가늠하기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처음에 질문이 생뚱맞다고 여기면서도 망설이지 않고 ‘당연히 좋아하지’라고 대답했습니다만 저도 모르게 마음 한편이 싸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입학하고 우리 반 학생들과 함께 석 달을 함께 지냈습니다. 그런데 제가 자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학생이 있다는 것은 저의 좋아함의 표현 방식이나 정도에 어떤 문제가 있었다는 것일 테니까요. 좋아함을 제 나름의 방식으로 전달한다고 했지만 그것이 제대로 된 소통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뜻도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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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는 종회를 하고 퇴근하는 차 안에서, 집에 돌아와 옷을 갈아 입고 은파에 나가 수변길을 걸으면서 학생과 교사 사이에 존재하는 ‘좋아함’의 의미를 천천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학생과 교사는 교육을 매개로 만나는 주체들입니다. 좋아함이라는 정서는 이와 같은 교육의 수준이나 성패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교사를 좋아하는 학생이 배움에 더 진력하고, 학생을 좋아하는 교사가 가르침에 더 매진한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다만 저는 학생과 교사가 함께하는 교육 행위에 관여하는 좋아함의 표현 방식이나 그 본질적인 의미 속에 일반적인 차원의 좋아함이라는 말이 환기하는 표현 방식이나 의미와 다른 무엇인가가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겉으로 보아 학생을 살갑게 대하지 않고 엄하게 대하면서 체계와 질서를 중시하는 교육을 실천하는 교사가 학생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을까요. 반대로 교사 자신의 교육 방향이나 의도와 다른 학생의 욕구와 바람을 최대한 중시하면서 그것으로 친밀함을 표현하는 것을 중시하는 교사가 진정으로 학생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좋아함의 일면에는 좋아하는 대상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와 격려와 칭찬 등이 분명히 자리 잡고 있을 것입니다. 좋아하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근본적인 관계나 신뢰는 바로 이런 것들을 통해 형성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맥락과 상황에 맞게 적절한 수준에서 객관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지지와 격려와 칭찬은 때로 대상에게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어른의 부적절한 칭찬은 우아하게 춤추는 고래가 아니라 삶의 경로를 스스로 찾지 못하고 주변의 눈치를 보다가 시간을 허비하는 비틀거리는 고래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3

   

저는 좋아함의 진정한 본질이 관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시즌 3편이 방영 중인 인기 드라마 <낭만 닥터 김사부>를 즐겨 보던 때가 있었습니다. 드라마를 보면서 주인공 김사부의 모습에서 교사의 태도나 정체성 같은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극 중 김사부의 후배 의사들은 처음에 김사부에게 강한 거부감이나 저항감을 보이다가도 김사부의 ‘낭만’에 하나둘 물들어가면서 김사부의 사람이 됩니다. 김사부가 의사 대 의사라는 건조한 직업 관계뿐 아니라 그 이전의 인간 대 인간이라는 본질적인 관계에 터를 잡아 후배 의사들을 대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후배 의사들은 때로 거칠고 때로 매정해 보이는 김사부의 말과 행동 이면에서 자신들을 포함한 모든 인간을 향한 김사부의 신뢰감을 읽어냅니다.

  

한편 김사부는 의사로서 강한 책임감(responsibility)을 보여 줍니다. 극 중 김사부가 즐겨 쓰는 “살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린다.”라는 말은, 의사로서 돈이나 명예나 권세를 통해서가 아니라 인간(환자)에 초점을 두어 의료 행위를 하는 김사부의 책임 의식을 대변해 줍니다. 김사부는 환자의 형편이나 사회적인 계층이 아니라 그가 ‘인간임’이라는 사실 자체에 눈길을 주고 그에게 귀를 기울입니다.


책임은 단순히 “맡아서 해야 할 임무나 의무”만 뜻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에 관련되어 그 결과에 대하여 지는 의무나 부담, 또는 그 결과로 받는 제재(制裁)”만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책임은 영어 단어 ‘responsibility’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반응하거나 대답할 수 있는(response) 능력(ability)을 가리킵니다. 누군가가 걸어 오는 말을 무시하지 않고 거기에 반응하면서 설명하는 것, 그를 향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는 것, 이로써 그와의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책임진다는 것은 최소한의 임무나 의무 수행이나 제재에서가 아니라 그와 맺는 진실한 인간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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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든 부모든 학생이나 자녀와 진정한 관계를 맺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자주 우리의 선한 의도나 목적을 무시하거나 잘 모르거나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때 10대 시기의 발달 특성이나 감수성, 아이들을 둘러싼 사회 문화적 환경이나 조건 등이 아이들을 그렇게 만드는 요인처럼 거론되곤 합니다.


그런 점들에도 불구하고 저는 우리가 책임감을 갖고 아이들과 맺는 진실한 인간 관계를 굳건히 유지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핵심에 아이들이 자녀이고 학생이기 이전에 하나의 고유한 ‘개인(個人, individual)’이라는 사실이 깔려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모든 개인은 굳어진[固], 사람[亻=人]이므로 더는 나눌(divide) 수 없는(부정, 불가능의 의미가 있는 in-) 존재입니다.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그 자체로 인정받고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가정의 달 마지막 날을 맞아 ‘좋아함’의 깊은 의미를 생각해 보는 편지글의 마지막에 새겨 넣어 봅니다.


고맙습니다.


2023년 5월 31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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