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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Aug 31. 2023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유능한 살인 기계가 되었나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2023)의 《아주 평범한 사람들》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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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유대계 미국인으로 언론인이었던 밀턴 마이어는 독일 나치 시대 홀로코스트 연구의 새 장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책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1956; 2014, 갈라파고스)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내 조국을 약간 두려워하게 되었다. 독일이 그랬던 것처럼 현실과 환상이 조합된 압력에 노출될 경우, 내 조국이 과연 무엇을 원하고, 가지고, 좋아하게 될지를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내가 만난 사람은 독일인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는 단지 특정한 조건 하에서 독일에 있었을 뿐이었다. 특정한 조건 하에서는 그가 이곳에 있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특정한 조건 하에서는 그가 바로 나 자신이 될 수도 있다.” (13쪽)


마이어는 나치당이 독일 전역을 지배하기 시작할 무렵인 1935년 한 달 동안 베를린에 머물면서 히틀러를 면담할 계획을 세웠다가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한 잡지의 특파원으로 독일을 방문한 마이어는 어린 시절 만난 독일인들을 다시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나치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었다. 나치즘이 무기력한 수백만 명 위에 군림하는 악마적인 소수의 독재가 아니라 광범위한 대중들이 참여하는 자발적인 운동 위에서 작동하는 시스템임을 깨달은 것이다. 이에 따르면 나치즘을 이해하는 데는 히틀러보다 “평범한 독일인”이 더 큰 도움이 된다.


마이어는 평범한 나치 당원 열 명을 인터뷰하고 나치 시대 비극의 본질이 평범하고 선한 사람들의 침묵과 방관에 있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들 독일인처럼 모종의 현실(어려운 경제 상황)과 환상(낭만적인 게르만 민족주의)이 결합된 구조 아래서 살게 된다면 우리 역시 언제 어디서든 가공할 전체주의 사회를 열어젖힐 수 있다. 9년 전 마이어의 책을 구해 읽다가 위의 서문 구절을 만나 불길함에 가슴이 떨렸던 기억이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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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역사가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이 《아주 평범한 사람들: 101예비경찰대대와 유대인 학살》(1992; 2023, 책과함께)에서 살핀 문제의 핵심과 관점은 마이어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브라우닝은 1011예비경찰대대의 일지와 관련 문서 기록들에 기대 유대인 학살의 배경과 과정을 추적하여 평범한 독일인 경찰들이 효율적인 ‘살인 기계’가 되는 데 외적 구조에 따른 압력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보았다.


나치 패망 후 홀로코스트에 대한 연구는 전체주의론, 파시즘론, 결정론적 반유대주의론 등을 중심으로 한 거시적인 연구에서 실제 학살 현장이나 학살 집행자들의 상황에 초점을 맞춘 미시적인 연구로 전환돼 왔다. 브라우닝의 책은 후자를 대표하는데, 홀로코스트 자체를 촉발한 당대 독일 사회의 거시적 배경으로 경제 대공황, 카리스마적 지도력, 대중의 순응, 관료주의적·근대적 합리주의 등과 같은 구조적·상황적 요인에 주목하였다. 101예비경찰대대의 부대원들을 학살자로 만든 동인 또한 이와 관련된 맥락에서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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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예비경찰대대의 전신은 치안경찰 편제에 속해 있던 101경찰대대였다. 치안경찰은, 1936년 나치 친위대 제국지도자 하인리히 힘러가 독일 경찰 총수로 임명되고 제3제국의 모든 경찰 병력이 그 휘하에 들어온 후 경찰 내부에서 대규모 군대 대형으로 부대 배치를 편성한 여러 결과물 중 하나였다. 쿠르트 달루에게가 우두머리였다.


101경찰대대는 함부르크에 주둔하고 있던 중 1939년 독일 방위군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즉시 방위군에 편입되어 폴란드로 파견되었다. 폴란드 지역에 최초로 파견된 경찰대대였다. 101경찰대대는 그곳에서 2년간 36만여 명에 이르는 유대인 이송 및 이주 작전을 수행하였다.


1941년 함부르크로 귀환한 101경찰대대는 부대원의 타부대 분산 배치에 뒤이은 소집 예비군 보충에 따라 101예비경찰대대로 재편되었다. 장교 11명, 행정병 5명, 하사관과 대원 486명으로 이루어졌으며, 140명 정도 규모의 중대가 3개 있었고, 이들 3개 중대에 3개의 소대가 배속되었다. 부대장은 제1차세계대전 참전용사로 1급 철십자 훈장을 받은 53살의 빌헬름 트라프 소령이었다.


일반 부대원의 대부분은 독일 북부의 항구 도시인 함부르크 지역 출신이었다. 블루칼라 노동자 계층(부두 노동자, 트럭 운전기사, 보세창고 노동자 및 건설 노동자, 기계 운전사, 선원, 식당종업원 등) 출신이 63퍼센트였고, 숙련 노동자는 거의 없었다. 약 35퍼센트는 하류 중산층 출신(판매직, 공공기관이나 민간회사의 사무직 등 화이트칼라 노동자)이었고, 단 몇 명(2퍼센트)이 중산층 전문직(약사, 교사)이었다. 평균 연령은 39살로, 절반 이상이 37~42살 사이였다.


101예비경찰대대는 독일이 점령한 동부 유럽(특히 폴란드 지역) 일대에서 전격전 방식으로 유대인을 학살하였다. 불시에 한 지역에 들이닥쳐 학살 임무를 수행하고 다시 어디론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살해 과정을 이어갔다.

[사진 1] 유대인들이 학살 현장으로 끌려 가다가 숲 부근 나무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광경(402쪽)

101예비경찰대대의 첫 번째 학살은 1942년 7월 12일 폴란드 유제푸프 마을에서 있었다. 새벽에 시작해 이른 저녁에 이르기까지 17시간 동안 1,500명을 살해했다. 이후 1년 4개월간(1942.7~1943.11) 101예비경찰대대는 유대인 38,000명을 살해하고, 45,200명을 죽음의 강제수용소(트레블링카)로 이송하였다.

[사진 2] 웃통을 벗은 젊은이 9명이 직사각형 모양의 구덩이를 파고 있는 모습. 학살된 유대인들을 묻을 장소로 보인다.(4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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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함부르크 노동자 계층 출신 대원들이 살인 기계가 되어간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자.


학살의 서막이 펼쳐진 유제푸프에서 부대장 트라프 소령은 사살 임무 명령을 부대원에게 설명한 뒤 감당할 자신이 없는 사람을 앞으로 나오라고 선택권을 주었다. 480명이 넘는 부대원 중 10명 또는 12명의 대원이 앞으로 나왔다. 이들은 다음 명령 때까지 대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101예비경찰대대는 이후 12곳에서 유대인 살해 작전을 실시했다. 전체적으로 평균 10~20퍼센트를 제외한 전 부대원이 학살 집행 현장에 섰다.


첫 번째 학살 현장이었던 유제푸프에서 대부분의 부대원은 극심한 심적 압박에 시달렸다. 부대 전체적으로는 하루종일 거의 쉴 새 없이 원거리 총격과 초근접 조준 사살이 이어졌으나, 총격 사살을 견디기 어려운 대원들은 몇 명을 사살하고 교대 요청을 하는 방식으로 충격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101예비경찰대대는 유제푸프에서의 충격 때문에 이후 한 달 동안 게토 유대인 소개(疏開)나 강제이송 집행 작전에 투입되었다.


1942년 워마지 마을에서 두 번째 집단학살이 이루어졌다. 이때 유대인 1,700명을 살해한 뒤, 부대원들은 사살 임무 앞에서 “점차 효과적이고 무감각한 학살 집행자로 변해 갔다.”(130쪽)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집단 구성원과의 동일시, 눈에 띄는 행동으로 집단에서 분리되는 데 따른 위험성, 유대인들의 운명은 어차피 정해져 있었다는 점 등등 사살에 대한 정당화와 합리화 논리 등이 이들을 추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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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들이었다가 대규모 학살전에 기꺼이 적응해 나간 부대원 80퍼센트의 행동을 이끈 요인이 무엇이었을까.


학살 행동에 관한 일반적인 설명 모델 중에는 전시(戰時) 야만화, 인종주의, 임무의 분업화와 관례화, 학살자의 특별 선발(special selection), 출세주의, 맹목적인 복종과 권력에 대한 경의, 이데올로기적 세뇌, 동료 집단에 대한 동조(同調) 등이 포함된다고 한다.(245쪽) 브라우닝에 따르면 101예비경찰대대의 부대원들은 이 모든 요소로부터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나치 시대 독일 경찰의 ‘엘리트’ 부대인 300번대 대대들(303대대, 304대대, 320대대)은 고도로 나치즘에 물들고, 집중적으로 훈련되고, 세뇌된 청년들로 구성되었다.(358쪽) 101예비경찰대대의 학살 기록이 경악스러운 까닭은, 그것이 엄선된 부대원으로 구성된 이들 엘리트 대대의 학살 기록을 능가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브라우닝은 홀로코스트 연구 분야에서 101예비경찰대대가 유익한 연구 사례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보았다.


나는 오늘날 브라우닝의 책이 갖는 가치와 의의 역시 이와 관련된 맥락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평범한 독일인 노동자들이 기능적인 살인 기계가 되어 수만 명의 유대인을 몰살한 101예비경찰대대의 사례는 불과 80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우리와 무관한 먼 과거의 일일 뿐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브라우닝은 그렇게 낙관적이지 않다. 나도 브라우닝의 생각에 동의한다.


“나는 오늘날 우리가 전쟁과 인종주의가 만연한 세계에 살고 있으며, 국가가 대중을 동원하고 또 그들의 명분을 정당화하는 힘 또한 여전히 막강할 뿐 아니라 계속 더 커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전문화와 관료화 때문에 개인의 책임감이 점점 더 희박해져가고 있으며, 집단이 개개 구성원들에게 거대한 압력을 행사하며 도덕적 기준을 부여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매우 두렵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만약에 어떤 근대적인 정부들이 집단학살을 자행하기 위해 ‘평범한 사람들’을 그들의 ‘자살적인 학살 집행자’로 동원하고자 시도하기만 하면 여전히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347쪽)


* 크리스토퍼 로버트 브라우닝(1992; 2023), 《아주 평범한 사람들: 101예비경찰대대와 유대인 학살》, 483쪽, 2만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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