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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Aug 25. 2023

“슬픔을 느낄 줄 아는 인간이 되라”

노다 마사아키의 《전쟁과 죄책》(2023, 또다른우주)을 읽고

1


쓰치야 요시오는 일본 헌병대의 맨 밑바닥에서 시작해 일반 병사가 진급할 수 있는 최고 지위까지 오른, ‘특고(특별고등경찰; 사상 문제 담당)의 신’이라고 불린 헌병이었다.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가, 고향 마을에 새집을 지어 주고 싶다는 조그만 소망과 유능한 헌병이 되겠다는 공명심을 가슴에 안고 자신의 일에 매진했다. 1931년 중국에 온 이후 14년간 쓰치야의 손 아래서 328명이 직·간접적인 죽임을, 1,917명이 체포·고문을 당했다.


쓰치야는 잔인함의 극을 달리며 “범죄를 저질러놓고도 상처 입지 않”(362쪽)았던 냉혈한이었다. 전범으로 체포되어 사상 개조를 받은 뒤 고통받은 중국인들에게 공감하고 잔학했던 자신을 자각하면서 감정을 느낄 줄 아는 능력이 생겼다.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의 찢어진 틈새로 감정을 토해내고, 마침내 이데올로기의 갑옷”(362쪽)을 부술 수 있었다.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열거했다고 해도, 그것은 기억의 단순한 재생에 불과하다. 사건으로 정리하고 지적으로 반성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 감정을 되돌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때의 행위는 당시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죄의식을 느끼지 않게끔 방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 본연의 감정은 아직도 상처 입지 않도록 수많은 변명으로 겹겹이 쌓여 있었다. 감정이 통하는 인간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무감각한 채로 체험해 왔던 행위를 돌아보고, 추상 속에서 다시 느끼지 않으면 안 된다.” (361~362쪽)


2


일본인 정신과 의사가 썼고, 제목이 《전쟁과 죄책》인 이 책은 ‘전쟁’과 ‘죄책’이라는 단어가 환기하는 일반적이고 함축적인 의미로 인해 상투적인 주제의식이나 메시지로 휘갑될 것 같은 예감을 먼저 불러일으킨다. 제2차세계대전과, 그 기간 일본군이 벌인 잔학한 전쟁 범죄 들이 머리에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책을 모두 읽고 난 지금, 그런데 나는 저자 노다 마사아키가 전하고 있는 의외의 주제와 메시지를 곱씹으면서 이 책의 가치를 새삼 깨닫는다.


“슬픔을 느낄 줄 아는 인간이 되라. 타자의 슬픔을 감싸 안는 문화를 만들어 내라.”


3


《전쟁과 죄책》은 정신의학자 노다 마사아키가 제2차대전 전쟁 참가자와 그 후손 등 모두 열명의 생을 좇아 궤적을 추적하고 관련 문헌 기록을 토대로 그들과 상담하면서 양심과 죄책의 문제를 치밀하게 분석한 책이다. 저자는 이데올로기적 정신주의에 집착하면서 강함을 추구하는 일본 문화가 사람들의 감정을 마비시키고 죄의식을 억압하는 결과를 가져왔음을 냉철하게 비판한다.


책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군의관, 중대장, 소대장, 특무기관원, 헌병, 일반사병 등의 신분으로 전쟁 범죄자로 분류되었다. 이후 체포→강제이송→억류→재소환→심문→재판 등의 전후 전범 처리 절차를 밝고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이 과정에서 저자가 주목하는 지점은 주인공들이 전쟁 중 저지른 행위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으며, 체포 뒤 일련의 시간 동안 어떤 인식의 변화를 겪는가 하는 것이었다.


전범들 대부분은 평범한 출생 배경이나 성장 환경과 무관하게 타국의 민간인들을 상대로 서슴지 않고 잔인한 살육 행위를 저질렀다. 일본 특유의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둔 군국주의 국가 시스템과, 전통적인 강함의 정신주의가 그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인간을 ‘물건’으로 취급하는 태도와 ‘위에서 시켜서 한 전쟁’ 중에 행한 행위라는 생각과, 학살당하는 인간을 (일상적인 삶의 배경이나 생각과 감정이 없는) ‘물건’처럼 취급하는 태도가 여기에 겹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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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당국이 푸순전범관리소에서 일본군 전범을 처리한 과정을 보면 그들이 죄의식을 깨닫고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바꾸어 가는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이렇게 극적으로(?) 변하게 된 데에는 당시 중국 당국이 전범 처리 원칙으로 정한 ‘죄행 반성 교육’의 힘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전범관리소의 지도원들은 ‘사상 개조’의 목표를 갖고 일본군 전범들에게 절대적으로 안정적이고 인간적인 대우를 했다. 이로써 자기 내면의 깊숙한 감정에 기대어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고,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참회하면서 일본으로 돌아가 전쟁의 진실을 알리는 데 앞장서기를 바랐다.


약간의 개인차가 있지만 전범관리소에서 사상 개조 과정을 거친 전범들은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쳤다. 제1기는 충격과 허세, 반항의 시기이다. 전범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제2기에서는 수용과 학습이 이루어진다. 제3기에 전범들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탄바이(坦白; 죄행을 솔직히 고백함)’에 도달하여 죄를 자각한다. 마지막 제4기에 새 출발을 위한 마음의 희망을 얻는다.


5


일본에서 천황제 이데올로기가 키운 과도한 정신주의는 현실에의 과잉 적응과 복종으로의 도피, 죄의식 없는 악인을 만들어냈다. 전쟁은 위에서 시켜서 한 것이므로, 자신이 전쟁 중에 저지른 잔학한 행위들에 대해 ‘스스로 한 전쟁’이라는 식의 죄책감을 갖지 않는다. 이로 인해 감정이 메말라가고, 경직된 이데올로기로 인해 정신은 단순하고 얄팍하다.


나는 우리가 이 책에 실린 일본 전범들의 사연을 지난 한 시대의 일본에 관한 이야기로만 받아들인다면 이 책의 가치를 절반밖에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의 모습이 뚜렷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누군가 살짝 건드리면 쉽게 폭력적인 말과 행동으로 폭발해 버리는 걸어다니는 폭탄들이 늘고 있는 현실, 세상을 향한 울분과 강함에 대한 왜곡된 집착을 폭력적으로 분출하는 사람들. 양육강식과 경쟁을 중시하는 사회 구조나 분위기 탓에 각 개인은 부정적인 에너지를 가슴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가 어떤 계기가 생기면 그것을 한꺼번에 충동적인 방식으로 세상 속으로 던져 버린다.


더구나 일본과 이웃한 우리나라는, 일본과 복잡하게 얽힌 역사적인 굴레도 굴레이거니와 베트남 전쟁에서의 양민 학살과 광주 민주화운동에서의 시민 탄압, 불법체류 이주노동자나 사회적 소수자 등 약한 자들을 향한 가학적 폭력의 사례들이 너무나도 많아 양심과 죄책감에 대한 특별한 인식의 변화가 절실히 필요하다. “슬픔을 느낄 줄 아는 인간이 되라”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곱씹어 본다.


* 노다 마사아키 씀, 서혜영 옮김(2023), 《전쟁과 죄책》, 또다른우주, 482쪽, 1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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