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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Oct 05. 2023

가르침과 배움에 대하여

10월 담임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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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이 도둑처럼 찾아왔습니다. 조석으로 부쩍 선선해진 기운에 저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는 손길이 낯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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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평소 우리나라 교육의 역사에 관심이 많아 이를 연구하고 다룬 책들을 즐겨 읽는 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읽기를 꺼려 하는 연구 논문도 일부러 찾아 살펴보곤 합니다. 그렇게 우리나라 교육사에 관한 저작들을 챙겨 읽던 중 작년 연말 즈음에 어느 책의 주석에서 《서당의 일상》이라는 책을 만났습니다.     


교육의 역사를 다룬 저작들을 보면 보통 거시적이고 일반적인 차원에서 당대의 교육제도나 교육정책을 다룹니다. 실제 교육 현장의 생생한 모습이나, 교육에 참여하는 학생과 교사들이 하루하루 살아 가는 모습을 그린 저작들은 손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저는 ‘일상’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 제목을 보자마자 인터넷 검색창을 열었습니다.     


책은 노재찬, 정경주, 신승훈 등 3명의 연구자가 역주(譯註; 번역하고 풀이함)하였습니다. 번역 과정을 거쳐 나왔으니 한문본을 모본(母本)으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책에는 “소눌 노상직의 서당 일지 『자암일록(紫巖日錄』”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는데, 출판사 서평 첫머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었습니다.     

“『자암일록(紫巖日錄』은 근세 영남지방 남부의 밀양과 김해, 창녕, 창원 일원에서 강학하였던 소눌 노상직(盧相稷, 1855~1931) 선생이 밀양 단장면 노곡(蘆谷; 가실)의 자암서당에서 강학하면서 남긴 강학일지이다.”(이 문장은 책에 “자암일록 해제” 부분의 ‘서설’ 첫 문장으로 실려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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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은 근대 이전 우리나라에서 보통교육을 담당했던, 오늘날로 치면 대략 사립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교육기관입니다. 책을 읽으면 김홍도의 서당 그림에 인상적으로 그려진 매 맞고 우는 아이, 그런 아이를 보고 웃으며 은근히 좋아하는 주변에 둘러앉은 아이들이 서당에서 하루하루 어떻게 지냈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곧장 책을 구하려고 인터넷 서점 몇 군데를 돌아다녔습니다. 안타깝게도 절판 상태였습니다. 출판사를 통해 책을 직접 구입할 요량으로 책 서지 정보에 있는 전화번호를 확인해 번호를 눌렀습니다. 없어진 전화번호라는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습니다. 잠시 실망하다가 출판사 측에서 책을 쓰는 저자들에게 주는 증정본이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역주(번역하고 풀이함.)자 중 한 분인 정경주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의 재직 학과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경상대 한문학과 사무실 조교가 정 교수님을 잘 아신다는 또 다른 교수님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그 교수님께 정중하게 문자를 보내 양해를 구하고 통화를 한 끝에 정 교수님의 연락처를 알아냈습니다.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말씀드리자 소장본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흔쾌히 책 한 권을 보내 주셨습니다. 부록으로 실린 한문 원문 영인부까지 900쪽이 넘는 대작이었습니다. 틈 날 때마다 아껴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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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암서당의 하루하루를 기록한 자암일록은 1899년 3월부터 1901년 12월까지 약 2년 동안 작성되었습니다. 자암서당은 오늘날 식으로 말하면 기숙형 사립초등학교처럼 운영되었습니다. 학생들이 서당에서 학습과 숙식을 병행하면서 하루 일과를 보냈습니다. 오전 수업인 조강(朝講)과 오후 수업인 일과(日課), 저녁 보충학습에 해당하는 석강(夕講) 등으로 하루를 보냈습니다.      


자암서당의 교육 방법은 단순해 보였습니다. 학생들은 각자의 학업 진도에 따라 개별적으로 공부를 했는데, 독서 과제를 강송하거나 정해진 과정에 따라 독서 또는 작문, 작시 등을 실시했습니다. 학습 진도를 확인하는 강송은 일정 기간 정해진 학습 분량을 암송하여 외고 문장의 뜻을 해석하는 정도에 따라 ‘통(通), 약(略), 조(粗), 불(不)’ 등 4단계의 성적을 매겼습니다. ‘불’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다음 단계로의 진입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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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의 학업 성취 여부를 점검하는 강회(講會) 의식인 정읍례(庭揖禮)를 보면 자암서당에서 가르침과 배움의 과정과 결과를 확인하는 일을 얼마나 준엄하고 진지하게 다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정읍례는 유교 선비들의 집회 의식 절차를 엄격하게 따르게 하면서 읍양(揖讓: 두 손을 맞잡아 얼굴 앞으로 들어 올리고 허리를 앞으로 공손히 구부렸다가 몸을 펴면서 손을 내리는 동작)과 진퇴(進退)의 동작을 익히는 행사입니다. 참가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이 홀기(笏記, 일종의 행사 식순지)에 세세하게 규정되어 있었고, 이에 따라 행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서당에서 지내는 학생들은 마치 시시티브이(CCTV) 카메라 렌즈에 잡히는 사람들처럼 크고작은 동작이나 행동 하나하나가 세밀하게 묘사되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 동자 노갑철은 머리의 자세가 바르지 못했다. 택용은 발의 자세가 중후하지 못했다.
2. 필량은 피곤하다고 누웠다.
3. 정환과 택용이 드러누웠다. 정환은 택용이 드러누웠는데도 “드러눕지 않았다.”라고 했으니 이는 남을 구하기에 급급하여 자기를 속이는 줄 알지 못한 것이다.
4. 상락의 걸음걸이가 단정하지 못하여 매를 2대 맞았다.
5. 택용, 필창, 일경이 잠깐 농지거리를 했다.
6. 일경은 직일(直日: 일종의 당번)이 과실을 기록할까 봐 두려워하여 직일의 눈을 피해 나무 사이로 들어가 졸았다.
7. 정용이 피곤하다고 누워 쉬다가 직일을 보고는 일어났다.
8. 갑이 웃고 말함을 조심하지 않았다.
9. 상락은 아침 과제를 외지 못했다. 매를 5대 맞았다.
10. 왈용, 갑철이 길 가 시내에 나가 놀았지만 이웃에 상사(喪事)가 있었기 때문에 매 맞기를 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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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시대나 사회 현실의 자장 안에 있으므로 자주 바뀝니다. 한 시대의 이데올로기, 문화, 풍속, 제도 들이 교육에 관여하는 사람들의 의식과 생활에 영향을 미칩니다. 교육의 내용과 방법이 뜨거운 유행처럼 퍼졌다가 사라지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런 중에도 변하지 않는 교육의 철학이나 원칙이 있으며,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은 사람의 일이므로 교육하는 사람은 사람됨을 중히 여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기록자에게 학생들의 평소 말법과 동작과 행동거지를 기록하게 한 자암서당의 교육과정 속에는 말과 행위가 주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세심하게 살피라는 뜻이 숨어 있을 것입니다.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 인간의 조건을 중시하는 관점의 반영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개인의 편안과 이익과 영달이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처럼 운위되는 세상입니다. 학생 개개인의 성장과 발달이 교육 현장에서 지고의 원칙처럼 받아들여지는 현실을 부당하게 비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한편으로 개인적인 성취를 달성한 개인이 만들어 가는 세상이 과연 사회 전체에도 행복감을 안겨줄 것인지, 성장하고 발달한 개인들의 모습이 전체 사회를 이루는 데에도 그대로 반영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섬세하게 따져봐야 할 측면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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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20세기 초 경남 산골의 자암서당에서 인생의 한 시기를 보낸 선생님들과 학생들을 생각해 봅니다. 서구 근대문명이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오던 시대 현실의 한복판에서 답답하고 언뜻 폭력적으로까지 보이는 통제식 교육 과정을 거치면서 그들이 몸과 마음에 새긴 교육의 흔적은 무엇이었을까요. 가르침과 배움의 나날을 기록하며 이루려고 했던 바람이나 목표는 무엇이었을까요.   

   

때로 종잡기 힘들고 때로 이해할 수조차 없는 우리 시대, 우리 사회의 적나라한 현실과 학교교육을 둘러싼 교육 현장의 민낯을 둘러봅니다. 그러면서 한 세기 전 조그만 서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고리타분해 보이는 교육이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떠올려 봅니다. 오늘의 교육이 어제의 교육의 자식인 것처럼 내일의 교육은 오늘의 교육에 따라 크게 좌우될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3년 10월 5일 목요일

교사 정은균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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