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담임 편지
1
안녕하십니까. 어떻게들 지내시는지요. 파란 하늘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시월의 마지막 날 아침입니다. 누구나 아는 대중가요 한 곡이 가져온 특별한 느낌이 아니더라도 이 계절은 누구든 감성 넉넉한 시인이나 작가로 만드는 것 같습니다. 지난 주말 지인들과 산행을 갔다가 하산을 하던 중 우리 뒤를 따르던 꽤 늙수구레한 중년 남성이 연신 이렇게 외치더군요.
“아, 얼마나 멋진가. 멋져, 멋져, 우리 산!”
2
지난 삼월 이래 어제(10월 30일)까지 제 은파 호변 달리기는 116회를 맞았고 그간 달린 전체 거리가 900킬로미터에 다다랐습니다. 오늘 아침 교실에 들어가 조회에서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중학교 1학년 시절의 마지막 남은 기간 두 달여를 각자만의 색깔과 방식으로 꾸준히 성실하게 보냈으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저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굴러가는 일상의 상투성과 단순성과 무심함을 깨뜨리는 것이, 역설적이게도 상투적이고 단순하고 무심할 수밖에 없는 어떤 꾸준한 일상의 행동과 일들임을 경험을 통해 실감하고 있습니다. 달리기 같은 운동이든, 매일 영어 단어 스무 개씩 외우기나 책 한 쪽 읽기든 자기 자신과 약속을 하고 무슨 일인가를 꾸준히 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 삶이 충실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3
작년 늦은 봄 은파 호변을 따라 차를 몰고 퇴근하던 중 우연히 스치듯 마주친 한 중년 남성 이야기를 들려 드릴까 합니다. 아저씨는 달리기를 하고 있었는데 자세와 동작이 많이 어색했습니다. 누가 보아도 뇌졸중에 걸린, 속어식으로 표현하면 ‘풍에 걸린’ 사람 모습과 똑같았습니다. 한쪽 팔은 겨드랑이에 거의 붙이다시피 한 채 손만 위아래로 까닥이는 식으로 흔들었습니다. 다른 한쪽 팔은 이보다 나은 형편이었지만 그다지 힘이 있거나 위아래로 길게 흔드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한쪽 다리가 심하게 꺾인 채로 달리는 모습이 위태롭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저씨는 은파 달리기를 거의 하루도 빼 먹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집에서 운동을 나오는 시각을 정확히 지키면서 나오는 것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만, 대체로 제 퇴근 무렵쯤에 맞춰진 듯 보였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퇴근길 차 안이나 은파 수변 길 위에서 여러 번 마주쳤습니다.
4
얼마 전이었습니다. 여느 날처럼 저는 퇴근길 차를 몰고 가다가 길에서 달리기를 하고 계시는 아저씨를 보았습니다. 어딘지 이상했습니다. 달리는 폼이 여느 때와 다르게 너무나 안정적이고 힘차게 보였습니다. 자세히 보니 겨드랑이에 거의 붙어 있다시피 한 팔을 위아래 넓은 각도로 힘차게 흔들고 있었습니다. 위태로워 보이기만 했던 두 다리의 움직임도 한결 부드럽고 안정적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저는 지난 1년여간 우연히 마주쳤을 때마다 보았던 아저씨의 표정을 떠올렸습니다. 힘든 몸으로 걷기가 아니라 달리기를 하는 일이 얼마나 힘이 들지는 굳이 다른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겠지요. 아저씨의 얼굴은, 질병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몸 자체에서 느끼는 힘듦과 온몸을 서야 하는 운동에서 받는 힘겨움 때문에 늘 알지 못할 고뇌(?)와 땀이 복잡하게 뒤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아저씨는 하루가 멀다 하고, 심지어 비가 오는 날에는 비옷을 걸쳐 입고 은파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극적으로, 아니 더 사실에 가깝게 말한다면 달리기 운동을 꾸준히 하는 평범한 일상을 한시도 멈추지 않은 결과에 힘입어 달리기를 하는 모습이 바뀐 아저씨가 얼마나 감동적으로 다가왔는지 모릅니다. 저는 잠시 숙연함을 떠올렸습니다.
5
며칠 뒤 퇴근하고 은파를 달리던 중에 물빛다리 한가운데서 아저씨를 마주쳤습니다. 저는 크게 용기를 내어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아저씨가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받아 주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은파에서 또 아저씨를 마주쳤습니다. 아저씨가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면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했습니다. 오가는 길에 마주쳤으므로 사이 길이 멀어졌지만, 우리가 은파를 징검다리 삼아 귀한 인연을 맺은 게 확실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6
‘1만 시간의 법칙’은 끊임없는 노력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미국 기자 출신 작가 맬컴 글래드웰이 2009년에 발표한 화제작 《아웃라이어》에서 빌 게이츠나 비틀스 같은 한 시대의 천재들(아웃라이어)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뒤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는 개념입니다.
노력만으로 안 되는 세상이 됐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그런 한편으로 무슨 일이든 노력하지 않고 어떤 일정한 성취 수준에 이를 수 없다는 말에도 수긍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는 천재가 아니며 천재가 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각자의 삶의 방향과 목표에 맞춰 응당 충실히 애써야 하고 챙겨야 하는 일들이 있는 것 또한 분명합니다. 당연히 이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목표에 조금 더 가까워지는 중요한 자세이자 태도일 것입니다.
7
한 달의 마지막은 이어지는 새 달의 첫날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 학생들이 지나가는 10월의 쓸쓸한 마지막보다 다가오는 11월의 첫 날이 환기하는 설레고 들뜬 기운에 주목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남은 2학기 시간을 각자만의 색깔과 방식으로 꾸준히 노력하면서 지냈으면 합니다. 학부모 보호자님들께서도 올해 남은 시간을 그렇게 꾸려 가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3년 10월 31일, 화요일
시리게 파란 가을 하늘을 보며
1학년 1반 담임 교사 정은균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