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평가, 어떤 기조와 방향으로 가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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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의 성장과 변화는 긴 시간에 걸쳐 이루어진다. 그가 어떤 역사와 문화를 가진 사회에 속해 있으며, 어떤 관습과 태도를 중시하는 가족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지를 보아야 한다. 교실과 학교 바깥의 현실이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아이 자신이 중요하다. 미국에서 발표한 어느 보고서(교육 평가와 지역 지원을 위한 전국 센터, <학생의 시험 점수에 기초한 교사와 학교의 수행 능력 측정>)에 따르면 학생이 받은 점수 변동 요인의 90퍼센트 이상이 학생 수준이라는 요인에 있다고 보았다. 놀랍게도 그 요인은 교사의 통제 밖의 일이다!(<교사의 전문성, 어떻게 만들어지나>, 살림터, 214쪽 참조)
학교와 교사가 아이에게 영향을 주는 요인을 중심으로 교육의 기능과 역할을 제고하려는 움직임을 대변하고 반영하는 제도가 학교 평가제 교사 평가제다. 아이들의 배움과 이를 통한 성장‧변화가 학교 외부의 영향력에 따라 좌우되고, 아이들의 점수가 바뀌는 것이 교사들의 통제선 밖에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학교와 교사를 평가하려는 시도는 멈추지 않는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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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3일 미국의 <Education Week>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위의 책, 364쪽 참조) 뉴욕 시에서 교사 수천 명의 ‘성과향상도 평가 결과를 공개했다. <뉴욕 포스트>가 이를 공개하면서 “최악의 교사(worst tescher)”로 지칭한 선생님의 이름까지 발표했다. 그 주인공 파스칼 마우클라는 기자의 추격을 받으면서 기능과 헌신성이 부족한 게 아니냐는 비판적인 질문을 받았다.
마우클라는 경험이 많고 평판이 좋은 교사인데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녀는 시내에서 가장 힘든 학교 중의 하나인 초등학교에서 영어를 말하지 않는 새로운 이민자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녀의 학교, PS11은 뉴욕 시로부터 A 등급을 받았고 뉴욕 시에서 가장 존경받는 교장 선생님, 안나 에프칼피데스가 이끌고 있었다. 그 교장은 마우클라는 아주 훌륭한 교사라고 선언하였다. (위의 책, 364쪽)
수년 전 나온 <워싱턴 포스트>의 기사 역시 교사 평가의 ‘위험성’을 방증한다. <LA 타임스>가 교사 6천 명에 대한 (아이들의) 성적 향상 사례를 분석한 결과가 “심각한 오류가 있다”고 보도했다. 몇몇 연구자가 <LA 타임스>의 자료를 학생 시험 점수의 긴 역사와 동료의 영향, 학교 수준 요인 등 여러 가지 요인을 활용한 대안적인 성적 향상 모델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다른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절반 이하의 교사들이 양쪽 모형 모두에서 똑같은 효과성 지수를 보였는데, 대안 모형에서 ‘효과적인’으로 판명되었던 교사의 8.1퍼센트가 <LA 타임스> 모델에서 ‘비효과적인’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반면에 대안 모형에서 ‘비효과적인’으로 판정받은 교사 중 12.6퍼센트가 <LA 타임스> 모델에서는 ‘효과적인’으로 규정되었다. (위의 책, 2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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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아이들이 누군가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는 곳이다. 아이들은 이를 통해 성장하고 변화한다. 이 ‘소박한’ 전제가 ‘진실’을 담고 있다고 전제하자. 교사들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미국 교육학자 넬 나딩스는 최근 국내에 번역된 <21세기 교육과 민주주의>에서 ‘책무성(accountability)’과 ‘책임성(responsibility)’을 구별한다. 나딩스에 따르면 전문직(교사) 누구나 책무성의 기본으로 학습 수행자가 자신의 전문적 결정과 행동에 책임을 지고 정당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기대를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결과 자체에 책임을 지는 것과 매우 다르다고 한다.
변호사는 모든 재판에서 승소할 수 없고, 의사는 모든 환자의 생명을 구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했던 일과 전문적 동료를 만족시켜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줄 것을 요구받는다. 그러기에 책무성을 학생의 시험 성적 차원에서 전적으로 정의를 하는 것은 개념을 왜곡시킬 수 있다. (넬 나딩스, <21세기 교육과 민주주의>, 살림터, 48쪽)
나는 나딩스의 책무성을 위계적인 권위주의 시스템에 기반한 개념으로 이해한다. 그것은 관료들이 틀에 박힌 행정 절차 하나하나를 규칙이나 규정과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따르듯이 교사에게 주어진 교육활동을 상명하달 식으로 내려보낸 ‘매뉴얼’(가령 교육과정이나 교과서)에 따를 것을 강요한다. 그렇지 않으면 ‘벌’이 뒤따른다.
나딩스는 책무성이 권위에 순응하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한다고 지적한다. 위계 구조 차원에서 위쪽을 겨냥하므로 보상이나 징벌에 대한 교사들의 취약점에 관심을 두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승진’이라는 ‘당근’과 ‘징계’라는 ‘채찍’이 관료적인 교직 사회를 이끌어가는 확고부당한 쌍두마차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싶은 교사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나딩스는 책무성보다 더 강력하게 교사에게 힘을 발휘하는 것이 책임성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책임성이 권한의 사슬에서 아래쪽을 겨냥하므로 교사들 각자의 돌봄과 역량에 의존한다고 본다. 그는 교사가 적어도 부분적으로 아이들의 신체적‧정서적 안전, 그리고 그들의 지적 성장뿐만 아니라 도덕적‧미적‧사회적 성장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학생들이 다음 학년이나 과정을 준비할 때, 그들은 반드시 영구적이거나 장기적인 학습과 관련되어야 한다. 여러 해가 지나면, 학생들은 학교에서 배운 것의 많은 부분을 잊어버리게 된다. 정말, 우리들 모두 한때,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익혔던 많은 세세한 부분을 곧잘 잊고 만다. 그러나 책임성을 가진 교사들은 학생들이 어떤 마음의 습관, 지적 호기심, 그리고 배움을 계속할 열정(혹은 적어도 의지)을 보존하기를 바란다. 교사는 수업의 단원이 학습의 즐거움을 죽이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교사는 학습하려는 욕구를 회복시킬 수 있는 새롭고 가치 있는 활동을 슬기롭게 만들어낸다. (넬 나딩스, 2009; 위의 책, 49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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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근무성적평정(근평), 교원능력개발평가, 성과급제 등으로 복잡하게 나뉘어 있던 교사 평가 기제가 올해부터 이원화한다. 근평과 성과급제를 통합하여 교원업적평가로 바꾸고, 기존의 교원평가를 개선해 그대로 유지하는 방식이다. 교원업적평가와 교원능력개발평가는 각각 ‘성과평가’와 ‘전문성평가’의 성격을 갖는다.
성과급제(2001년)와 교원능력개발평가(2010년)는 비교적 최근에 도입되어 실시되고 있었지만, 근평은 1964년부터 시작되었다. 거의 반세기 전이다. 이번 이원화가 교사 평가 시스템에 일대 ‘혁신’이 도래할까.
평가의 핵심 대상인 ‘성과’와 ‘전문성’을 어떻게 판별하고 나눌까. 쉽지 않을 것이다. 평가 결과를 성과급과 승진 등의 ‘보상’에 활용하는 ‘본질’이 바뀌지 않는 한 말이다.
이번 정부 개선안의 핵심은 교사들의 ‘행동’(학습지도, 생활지도 등)을 평가해 그 결과를 승진과 성과급에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존 맥베스 케임브리지 대학교 석좌교수에 따르면,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그들이 보여주는 행동에 대해 보상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고 한다.
결과 지향의 보상 기제가 작동하는 곳에서, 학교장들은 가장 훌륭한 교사에게 높은 위험을 감수하는 시험을 보게 될 학년을 맡긴다는 증거가 있다. 교사들은 교과과정 중에서 시험에 나오지 않는 영역에서는 최소한의 시간만 보내고, 많은 시간을 학생들이 시험 보는 전략을 연마하면서 보낸다. 성적이 낮은 학생들을 시험에서 제외시키고, 학교는 교실 수업에서 더 깊이 있고 시간이 걸리는 개선을 이루어내기보다는 짧은 기간에 성과를 거둘 수 있는 눈에 보이는 성과를 만들려고 애쓴다. (국제교원노조연맹보고서, <교사의 전문성, 어떻게 만들어지나, 살림터, 215쪽)
교육학자 이조레(Isore)는 효과적이고 공정하며 신뢰할 수 있는 평가 계획은 교사들이 그 제도를 거의 모두가 수용하고 활용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고 말했다. 자기 평가와 성찰 등 교사 자신에 의한 평가 계획과 실행이 필요한 까닭이다. 위계 시스템에 터 잡아 ‘위(교장)를 향하는 책무성’이 아니라 교실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아래(아이들)로 향하는 책임성’을 이끄는 평가 시스템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