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 집단과 권위 집단의 차이와 영향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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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가 사람을 만들지만, 그 제도를 사람이 만든다! 제도와 사람 간 선후와 인과 관계를 명확히 가르기가 쉽지 않다. 다만 지금은 야생의 시대가 아니다. 사람은 ‘숲’에서 나오지 않는다. 특정한 ‘배경’을 지닌 사회 안에서 나고 제도나 문화 아래서 성장한다.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칸트가 한 말이다. ‘사람’을 둘러싼 ‘제도’, 곧 시스템의 중요성을 일컫는 말이다. 학교 민주주의 문제를 고민할 때 배경으로서의 제도나 문화를 우선적으로 떠올리는 게 맞다.
전체는 그 부분들이 비대칭이어도 대칭일 수 있으며, 또 전체는 그 부분들이 안정적이어도 불안정할 수 있다. (중략) 집단은 하나의 사회학적 전체이며, 이 사회학적 전체의 한 단위는 다른 역동적인 전체의 단위와 마찬가지로 그 부분들의 상호의존성에 의해 정의될 수 있다. (중략) 이 정의는 사회집단의 조직과 안전성, 목표 같은 특성들은 그 집단 안에 있는 개인들의 조직과 안전성, 목표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쿠르트 레빈(2016), <사회적 갈등 해결하기>, 부글, 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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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심리학 창시자 쿠르트 레빈은 1939년에 쓴 에세이 ‘사회적 공간에서 행한 실험들’에서 아이오와 아동 복지 연구소의 로널드 리피트와 화이트가 행한 실험을 소개했다.[아래 관련 내용은 쿠르트 레빈(2016), <사회적 갈등 해결하기>, 부글, 100~116쪽 참조] 독재주의나 민주주의의 밑바닥에서 작용하고 있는 집단역학에 대한 통찰을 얻기 위한 실험이었다.
레빈은 교실의 ‘분위기’에 주목했다. 교사가 학급에서 이루는 성공의 정도가 교사의 기술뿐만 아니라 교사가 가꾸는 ‘분위기’에 크게 좌우된다고 보았다. 분위기는 “사회적 상황의 한 특성”(105쪽)으로 규정했다.
두 개의 학급에서 자원한 10세와 11세 학생들 중에서 선택해 소년과 소녀 집단을 하나씩 만들고 ‘민주적인’ 분위기의 집단과 ‘독재적인’ 분위기 집단으로 구별지었다. 참가자들은 가면을 만드는 클럽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민주적인 집단은 활동을 자유롭게 선택했고, 권위적(독재적)인 집단은 민주적인 집단이 한 활동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각 집단 지도자는 성인 학생이었다. 두 집단의 지도자는 집단의 서로 다른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점들에 노력을 기울였다.
관찰자들이 정해진 시간 단위 동안 일어난 사건과 행동 횟수를 기록했다. ‘지시’ 행동의 경우, 권위적인 리더가 민주적인 리더보다 2배 정도 많았다.(4.5건 대 8.4건) ‘순종적인’ 행동은 반대였다. 민주적인 지도자가 순종적인 행동을 더 자주 보였다. 평균적인 구성원에 비해 53퍼센트 덜 보였다. 권위적인 리더는 78퍼센트나 덜 보였다.
전체적으로 두 집단 모두에서 지도자의 순종적인 행동은 상대적으로 드물었다. 객관적인 행동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 레빈은 권위적인 리더가 민주적인 리더보다 집단 구성원들에게 영향력을 더 강하게 미치며, 권위적인 리더의 접근 방법이 훨씬 더 강력한 반면에 훨씬 덜 객관적이었다고 평가했다.
구성원과 구별되는 리더의 모습을 좀 더 살펴보자. ‘주도적인’ 행동. 권위적인 리더는 이상적인 구성원(모든 활동이 지도자를 포함한 집단의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배분되었을 때의 구성원)에 비해 118퍼센트 더 많이 보였다. 민주적인 리더는 41퍼센트 많았다. 전체적으로 순종적인 행동과 강압적인 행동 둘 다에서 일반 구성원과 리더의 차이가 민주적인 집단에서 덜 두드러졌다.
실험 대상이 된 민주적 집단을 보면, 공작 활동에 나타난 모든 협력은 아이들이 하위집단으로 자발적으로 조직된 결과였다. 독재적인 집단의 경우엔 공작 집단의 32퍼센트가 리더에 의해 조직되었다. 반면에 민주적인 집단에서 이런 식으로 조직된 공작 집단은 0퍼센트였다. 그렇다면 독재적인 분위기는 리더에서 훨씬 더 공격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권력을 안겨줌과 동시에 구성원들이 자유로이 활동할 범위를 축소시킨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구성원들이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영역도 좁아지게 마련이다. - 쿠르트 레빈(2016), 위의 책, 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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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의 영향력으로 인한 두 집단의 상이한 분위기를 보자. 권위 집단은 민주 집단보다 적대적인 지배가 30배 가량 많았다. 구성원의 주목을 요구하거나 적대적으로 비판하는 일도 훨씬 더 많았다. 민주적인 분위기에서는 협력, 칭찬, 건설적인 제안, 객관적이거나 순종적인 행동 들이 더 자주 보였다. 이를 근거로 레빈은 지도자가 제시하는 ‘삶과 사고의 유형’이 아이들 사이의 관계를 지배한다는 말도 가능하다고 해석했다.
가령 독재적인 집단에서는 협력적 태도가 아니라 적대적이고 매우 개인적인 태도가 지배적이었는데, 이런 태도는 ‘우리’라는 (집단) 감정보다 ‘나’라는 감정이 더 크기 때문에 생긴다고 보았다. 레빈은 ‘우리 중심적인’ 발언들이 민주적인 집단에서, ‘나 중심적인’ 발언들이 권위적인 집단에서 더 많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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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지도자, 아이들 사이의 관계는 어땠을까. 구성원들 간에 서로 덜 순종적인 권위 집단의 아이들이 지도자에게 복종하는 예가 민주 집단에서보다 배 정도 더 많았다고 한다. 권위 집단 아이들은 동료 아이들에게 덜 객관적이고 덜 협력적이며 덜 복종적이었으나 리더에게는 민주 집단에 비해 더 복종적이었다. 레빈은 권위적인 분위기에서 긴장이 더 크게 느껴진다고 하면서, 두 집단의 역학적 구조가 서로 다른 데서 이러한 행동 차이가 발생한다고 보았다.
(권위적인) 지도자가 세운 높은 장벽이 모든 구성원들이 리더십을 습득해 지위를 높일 수 있는 길을 막고 있다. 민주적인 분위기를 보면, 사회적 지위의 차이는 작고 리더십 습득을 방해하는 장벽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중략) 이 실험에서, 민주적인 집단의 모든 구성원들은 “우리를 강조하는” 감정을 강하게 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바로 그런 감정 때문에 자신만의 영역을 갖고 있으면서 개성을 더 많이 보여주었다. 반대로 독재적인 집단의 아이들은 지위가 낮고 개성을 많이 발휘하지 못했다. - 쿠르트 레빈(2016), 위의 책, 111쪽.
권위 집단 아이들의 모습은 권위적인 독재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서늘하게’ 말해준다. 이 아이들은 지도자에게 맞서 집단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동료 아이들 중 하나에 맞서 집단적인 행동을 하면서 그 아이를 가혹하게 다루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전체 열두 번의 모임 중 두 아이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레빈은 담담하게 말한다. 권위적인 지배 아래서는 리더십의 습득을 통해 지위 상승을 꾀하려는 노력이 차단되었다.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 드는 행태가 팽배해졌다. 모든 아이들은 다른 모든 아이들의 잠재적 적이 되었다. 아이들의 역장(力場)은 협력을 통해 서로를 강화하지 못하고 서로를 약화시켰다. 서로 힘을 합해 어느 한 개인을 공격함으로써,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높은 지위를 성취하지 못했을 구성원들이 그 아이보다 높은 지위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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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결과를 단지 개인의 차이로 돌리고 싶은 이들이 있을 것이다. 아이들 중 하나를 권위적인 분위기에서 민주적인 분위기로 옮기고, 다른 아이를 민주 집단에서 권위 집단으로 옮긴 예를 보자. 집단을 바꾸기 전 아이들의 차이는 그들이 속한 집단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와 똑같았다. 예컨대 권위 집단의 아이는 민주 집단의 아이에 비해 보다 더 지배적이고, 덜 우호적이며, 덜 객관적이었다.
그런데 집단을 바꾸자 이전에 권위적이었던 아이는 덜 지배적이고, 더 다정하고, 더 객관적인 아이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거꾸로 민주적 집단에 있으면서 우호적이고 객관적이었던 아이는 권위 집단으로 이동하자 순종적인 행동보다 지배적인 행동을 더 하고 다른 아이들에게 적대적으로 변했다. 아이들의 행동이 자신이 옮겨간 집단의 분위기를 금방 반영했다는 것이다. 연구 결과 독재적이고 권위적인 집단의 주요 반응 두 가지는 ‘공격성’과 ‘냉담’이었다고 한다.
독재적 상황에 처한 첫날에 아이들의 얼굴에 나타나는 표정 변화를 관찰하는 것보다 더 인상적인 경험도 없다. 다정하고 열려 있고 서로 협력적이던 집단이 불과 30분 만에 생기발랄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독창력 없고 무감각한 집단으로 바뀌어 버렸다. 독재주의에서 민주주의로 바뀌는 변화가 민주주의에서 독재주의로 바뀌는 것보다 시간이 조금 더 많이 걸리는 것 같다. 독재주의는 개인에게 강요되는 것인 반면 민주주의는 개인이 배워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쿠르트 레빈(2016), 위의 책, 1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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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곳의 분위기가 생각과 기분을 좌우한다. 레빈은 아이가 속한 집단이 아이가 서 있는 바탕이라고 규정했다. 아이와 집단의 관계와 아이가 집단 안에서 차지하는 지위가 아이의 안전감이나 불안전감에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요소들이라고 보았다.
학교와 교실을 감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분위기’를 ‘잠재적 교육과정’으로 부를 수 있겠다. 학교 문화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그것들이 가져오는 색깔이 그대로 학교 구성원들에게 투영된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다. 학교 민주주의가 모두를 살리는 길임을 굳게 믿고 이를 착실히 실천해야 하는 이유다.
* 제목 커버의 배경 이미지는 쿠르트 레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