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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Aug 31. 2016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상실을 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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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셋입니다. ‘전쟁’까지는 아니어도 집안이 늘 북적입니다. 아내와 둘이서 오붓하게 영화를 본 게 언제였나 싶습니다. 우리 부부 둘만의 오붓한 여행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둘이 손 잡고 흔한 커피집에 들어간 적도 별로 없습니다. 가끔 한숨이 나옵니다. ‘애들을 왜 셋이나 나았나. 하나만 있다면 세 식구가 얼마나 우아하게 보낼까.’ 가망 없는 상념에 빠집니다.

이젠 이런 생각이 없습니다. 아이가 얼굴에 아이스크림이 범벅이 된 채로 먹다가 와서 졸린다며 ‘안아 주세요’라고 말하고, 정신 없이 쿵쾅거리며 놀다가 셋이 나란히 앉아 그림책을 보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면서부터 그랬던 것 같습니다. 큰애가 제 동생들을 데리고 심부름을 다녀오고, 여섯 살 막내가 여덟 살 오빠를 챙긴다며 사탕을 건네는 모습을 볼 때 더 그랬습니다.


아이들은 저와 아내 없이도 저희끼리 잘 놉니다. 문득 알지 못할 상실감을 느끼곤 합니다. 큰딸이 처음으로 학교에 간 날은 온종일 우울했습니다. ‘품 안의 자식’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묘했습니다. 그런데 상실과 우울함 끝에 알 수 없는 충족감이 찾아왔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기쁨과 보람, 성취감 대충 그런 말들로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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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로 산다는 것>(2014, RHK)을 읽다 보니 그런 역설적인 감정의 흐름이 자연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모로 산다는 것, 부모가 되어 아이들을 키우는 것의 진정한 의미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를 이 책을 통해 좀 더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부모로 산다는 것’. 흔해 빠진 육아 서적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 책에는 자녀 양육에 관한 매뉴얼이 나오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육아 기술이 없습니다. 옮긴이는 이 책을 아이가 아니라 부모에 대한 책으로 규정했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 닥치는 온갖 문제를 원인요법 방식으로 다룬 책이라고 합니다.


즉각적인 효과를 보장하지만 재발 가능성이 높은 대증요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원인요법이기에 효과가 더디게 나타납니다. 하지만 원인의 뿌리를 밝혀 이를 제거하니 결과가 확실합니다.


글쓴이는 <뉴욕 매거진>의 베테랑 기자 제니퍼 시니어입니다. 책의 출발은 20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해 <뉴욕매거진>의 커버스토리로 ‘모든 게 기쁨, 그러나 재미는 전혀 없음(All Joy and No Fun)’이라는 제목의 특집기사가 발표됩니다. 시니어 기자가 기사를 썼습니다. ‘왜 부모는 육아를 싫어하는가’라는 부제가 붙었습니다.


반향이 컸습니다. 인터넷 조회수가 150만을 넘었습니다. <뉴욕 매거진> 역사상 최고의 기록이었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기쁜 일에서 불행을 느끼는 현대 가족(부모)의 역설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 덕분이었다고 합니다. 시니어 기자는 이 기사를 바탕으로 3년여간 추가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난 2014년 1월 미국에서 정식으로 발행되었습니다. 출간 즉시 아마존 종합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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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미국을 배경으로 합니다. 읽다 보면 글쓴이가 우리나라 현실을 꼬집으려고 쓴 듯합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낯익은 풍경들을 만납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 문제가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의 공통적인 관심사이기 때문이겠지요.


어리석은(?) 질문을 던져봅니다. 세상의 부모들은 원래부터 자녀들을 온갖 정성과 관심으로 키웠을까요. 이 책에 따르면, 미국 부모가 지금과 같은 양육 방식을 쓰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부터였다고 합니다. 채 70여년이 되지 않습니다. 본문 한 대목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부모로서 우리는 때로 우리가 놓여 있는 이런 환경이 과거의 환경과 동일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놓여 있는 이런 환경과 상황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다. 부모로서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모습이 얼마나 새로운지 그리고 얼마나 특이하고 비역사적인지 명심하지 않으면, 부모로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여전히 건설 중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없다. (중략) 70년이라는 세월을 길고 긴 역사 속에서 보면 그야말로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뜨는 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216쪽)

     

그 전 시대 아이들은 노동을 했다고 합니다. 농장이나 거리, 공장 등에서 일을 하는 것을 모두 당연하게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그렇게 해서 가족 경제에 보탬을 주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아이들이 가족의 새 ‘권력자’가 되기 시작한 것은 아동 노동 금지 법안들이 의회에서 통과되면서부터라고 합니다. 이때부터 가족 경제의 부담은 오로지 부모에게 맡겨집니다. 글쓴이는 부모들이 ‘돈 먹는 하마’가 되어버린 아이들을 양육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이 손아랫사람에서 손윗사람으로 바뀌었다고까지 말합니다.


이제 손윗사람이 된 아이들은 가족 내 질서를 교란합니다. 저자가 몇몇 사회학자의 말을 빌려 아이들의 ‘성스러운’ 지위가 전통 가족 구조를 뒤흔들어 놓았다는 지적이 인상적입니다. 도시계획 전문가인 윌리엄 화이트는 1953년 <포춘>에 게재한 기사를 통해 전후의 미국을, 자식이라는 뜻의 ‘filia’와 무정부 상태라는 뜻의 ‘anarchy’를 합성한 신조어 ‘Filiarchy’로 묘사했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라루가 <불평등한 어린 시절>에서 묘사한, 중산층에서 한층 뚜렷하게 나타난 ‘역전 현상’(아이들이 손윗사람이 된 상황)에 관한 다음 서술 대목을 봅시다.   

  

“중산층의 어린이는 자기 부모에게 자기 의견을 주장하면서 대들고, 자기 아버지의 무능함을 불평하며, 부모가 내린 판단을 헐뜯고 방해한다.” (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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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가 풀어놓는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오늘날 많은 부모가 생각하는 양육 방식이나 태도상의 원칙, 자녀에 대한 관점 등이 얼마나 모호하고 허술한 토대 위에 쌓여 있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글쓴이가 ‘전쟁’으로 이름 붙인 교육 문제를 살펴봅시다.


글쓴이는 ‘트로피 아내’에 빗댄 ‘트로피 아이’라는 신조어를 소개합니다. 트로피 아내는 능력과 재력을 갖춘 남자가 성공에 대한 보상으로 얻는 젊고 아름다운 아내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풍자적인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트로피 아이는 자녀가 이룩한 비범한 성취를 자랑하고 싶은 부모들을 꼬집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요새 아이들은 바쁩니다. 대개 부모의 계획과 뜻에 따른 결과입니다. 학교에서 정규 수업과 방과후 보충 수업을 마치고 나면 늦은 밤까지 여러 학원을 돕니다. 이를 두고 글쓴이는 과도한 일정이 아이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느긋하게 게으름을 피울 수 있는 자유와 그런 게으름에서만 얻을 수 있는 상상력을 갖지 못하게 한다는 비판자들의 의견을 제시합니다.


미국 중산층의 교육 방식을 설명하는 ‘집중 양육’ 개념이라는 게 있습니다. 2002년 사회학자 아네트 라루가 써서 고전 반열에 오른 <불평등한 어린 시절>이라는 책이 있다고 합니다. 이 책은 집중 양육을, 바쁜 부모에게 극심한 노동을 요구하고, 아이들을 지치게 만들며, 가족 집단이라는 발상이 성장할 기회마저 희생시키면서 개인주의가 자라날 수 있는 삶의 방식을 강조하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미국식 집중 양육의 결과는 서늘합니다. 글쓴이는 부모의 배려를 감지한 (특히 중산층의) 아이들이, 과거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했던 거친 말과 욕을 자신들의 부모에게 돌려주고 있다고 말합니다. 부모의 배려와 관심 등으로 충분한 권력을 부여받은 아이들이 부모들의 그런 태도 때문에 부모의 권위에 도전하고 심지어 거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글쓴이는 미국인 부부가 단 둘이 보내는 한 주 평균 시간이 1975년 12.4시간에서 2000년 9시간으로 크게 줄어든 점, “숙제가 우리 가족의 새로운 저녁 식사”(293쪽)가 되어버렸을 정도로 자식을 위한 부부들의 이른바 재능 봉사가 사회가 아니라 자기 아이들을 위한 것으로만 향하는 경향이 생겨난 사실을 언급합니다.

    

사람들이 각자 살아가는 세상은 점점 더 좁아지고 있으며, 아이를 잘 키워야 한다는 내면적인 압박감은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든간에) 점점 더 커진다. (중략) 다른 나라 그리고 다른 시대라면 노인을 봉양하고 사회운동에 참여하며 시민 리더십을 발휘하고 봉사 활동을 열심히 수행함으로써 이런 과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미국에서는 아이를 키우는 일이 그 대부분의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지금 미국에서는 양육과 관련된 책들이 이미 성서가 되어 버렸다. (294쪽)     


글쓴이에 따르면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상실을 피할 수 없다고 합니다. 아이가 어느 날 자기를 훌쩍 떠나갈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랑을 쏟아부어서 강하게 키우는 것이 부모가 수행해야 하는 역설의 역할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이 아이들이 머지않아서 우리의 가르침을 필요로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선물의 사랑(부모가 자녀에게 조건 없이 주는 사랑을 가리킴.)에는 무거운 과제, 스스로를 파기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진다.”라는 C. S. 루이스의 말이 인상적으로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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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똥기저귀를 갈면서 투덜댔습니다. 이제는 그 투덜댐을 맛보지(?!) 못합니다. 아이들이 놀자고 보챌 때 뒤로 미룰 때가 있습니다. 놀아달라는 말을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는 때가 왔습니다. 마트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달라고 막무가내로 조르는 막둥이 때문에 당황하고 짜증이 났던 기억도 납니다. 제 언니나 오빠가 그런 것처럼, 막둥이도 언젠가는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을 자기 스스로 사 먹겠지요.


아이들로 인해 생기는 귀찮음, 아이들이 제게 주는 짜증이나 화조차도 애틋합니다. 정신 없이 바쁜 하루하루가 속절없이 흘러가는 게 아깝습니다. 먼 훗날, 제 ‘기억하는 자아’(어떤 일을 경험할 때의 느낌을 실제 경험하던 느낌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게 하는 자아; 420쪽 참조)는 제 머릿속에 아이들과 함께 했던 과거의 모든 순간들을 행복과 기쁨으로 그려 놓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교무실이었습니다. 점심식사 후 차 한 잔을 마시던 중이었습니다. 옆 자리에 계시던 한 선생님이 그러시더군요.      


“어떤 사람이 페이스북에 아이들 학원 보내고 공부하라고 다그치는 일 앞으로 하지 않겠다고 써 놨네요. 맞는 말이지 않아요? 애써 키운 자식들이 이렇게 허망하게 떠나버릴 수도 있는 세상이니 사랑한다고, 마음껏 놀며 지내라고 여유를 찾아야 하지 않겠어요?”   

   

세월호 사고 이후 우울과 상실감에 빠진 우리나라 부모들 마음이 그렇지 않을까요. 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부모로 산다는 것은, 아이를 내 안에 간직하는 일이 아니라 저 넓은 세상으로 내보내는 일에 그 진정한 목표가 있다고 여겨서입니다. 그리고 그때, 믿음과 사랑을 듬뿍 받은 아이들이 한껏 날개를 펼치며 드넓은 세상에서 멋진 삶을 살아갈 수 있겠지요.


사랑한다는 말 한 번 제대로 나누지 못한 채 살아가는 가족들이 많습니다. 새 학기 초입니다. 비움과 내려놓음이 주는 여유가 함께하는 가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부모로 산다는 것: 잃어버리는 많은 것들 그래도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제니퍼 시니어 지음, 이경식 옮김 / RHK / 2014. 4. 19. / 478쪽 / 16,000원)  

   

* <부모로 산다는 것>을 새 학기 학부모들과 함께하는 책읽기 모임에서 읽을 첫 번째 책으로 정했습니다. 이 글은 재작년에 <오마이뉴스>에 써 올린 글을 조금 다듬은 것입니다. 인상적인 내용들이 가득합니다. 아이와 함께살아가는 어른들이 두루 일독했으면 좋겠습니다. 제목 커버의 배경 이미지는 <부모로 산다는 것>의 표지 사진입니다. 포털 <Daum> '책'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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