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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Sep 09. 2016

“마음의 습관” 된 능력주의, 문제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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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토크라시(meritocracy)’는 부, 권력, 명예 등과 같은 사회적 재화를 어떤 사람의 타고난 혈통이나 신분, 계급 같은 것이 아니라 오로지 능력에 따라 사람들에게 할당하자는 이념을 가리키는 말이다.(아래 ‘메리토크라시’의 개념, 특성 등에 관한 내용은 장은주 외(2014), <왜 그리고 어떤 민주시민교육인가>, 경기도교육연구원., 김경근・심재휘(2016), <중・고등학생의 능력주의 태도 영향요인에 대한 구조방정식 모형 부석>, 《교육사회학연구》 제26권 제2호, 한국교육사회학회. 등을 참조하였다.)     


M. D. Young이 1958년에 쓴 책 《메리토크라시의 부상(The rise of the meritocracy)》에서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김경근・심재휘(2016), 위의 글, 2쪽 참조.) 그는 메리토크라시를 능력(merit)이 개인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결정하는 정치제도로 간주했다.      


메리스토크라시는 일반적으로 ‘능력주의’나 ‘실력주의’로 번역된다. 그런데 ‘능력’과 ‘실력’의 개념을 어떻게 규정하고, 이들 사이의 어감 차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능력주의와 실력주의의 의미 범주가 조금씩 다르게 파악되는 것 같다. 이 글에서는 이들 중 무엇을 쓰든 각각의 뉘앙스에 따른 의미 효과를 적절히 전달하지 못할 것으로 보아 원어 그대로 쓰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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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메리토크라시는 사회 전체에서 능력이나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부와 명예를 가지며, 또 그런 식의 분배가 ‘정의롭다’고 정당화되는 사회체제와 관련된다. 하지만 그 개념을 일률적으로 정의하는 일이 그다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국내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그에 대한 개념 정의가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누구나 자신의 능력에 상응하는 기회를 부여받고 기여한 정도에 따라 공정하게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원칙”[김경근・심재휘(2016), 위의 글.], “마음의 습관”[김미영(2009), <능력주의에 대한 공동체주의의 해체: 능력・공과・필요의 복합평등론>, 《경제와 사회》 제84호, 비판사회학회.],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규율체제[(손준종(2004), <교육논리로서 ‘능력주의’ 제고>, 《한국교육학연구》 제10-2호, 안암교육학회.] 등으로 정의하고 있다. Young은 ‘merit’를 “지능과 노력의 결합체”로 이해했다.   

  

김경근과 심재휘에 따르면 메리토크라시는 근대 이후 사회경제적 지위를 배분하기 위한 가장 합리적인 원리로서 수용되어 왔다고 한다.(아래 메리토크라시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이에 따른 연구사는 이들의 논문을 참조해 정리했다.) 사회학자들은 메리토크라시가 산업사회에 가장 적합한 정치제도라고 주장했다. 산업사회가 본격화하면서 부모세대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자녀에게 세습되는 직접적인 경로가 약화한 점, 세대 간 계층이동 행태가 역동적이라는 점, 그 결과 메리토크라시가 인적자원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효율적인 원리로 작동하고 있는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메리토크라시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은 지능검사의 발달에 따라 각 개인의 인지적 능력을 중시하는 관점이 크게 유행하면서 확대된다. 많은 연구자들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시간이 지날수록 계층 간 교육격차가 점차 줄어들고 교육수준이 소득을 결정하는 정도가 강화되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한 점이 그 배경이 되었다.     


메리토크라시가 정당성과 합리성을 가지려면 몇 가지 전제를 충족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기회를 균등하게 갖는다. 경쟁이 공정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다. 결과를 기준으로 합리적으로 보상을 받아야 한다. 따라서 능력주의가 적용되는 사회에서는 차등적 보상이 불가피하며, 기회와 보상의 배분이 사회적 지위나 권력 여하에 따라서가 아니라 업적이나 시험 결과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김경근・심재휘(2016), 위의 글, 2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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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토크라시의 정당성은 그것이 공정한 기회 부여와 경쟁, 합리적인 성과 배분의 기제로 작동할 때 확보된다. 우리나라 현실을 둘러보면 메리토크라시의 정당성을 의심하게 하는 현상들이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수저 담론’이 대표적인 예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배경에 따라 ‘수저 색’이 결정된다는 수저 담론은 개인의 능력과 노력을 강조하는 메리토크라시의 작동 원리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수저 계급론이 담론 차원에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배경적인 차원에서 수저 담론을 뒷받침하는 구조적인 요인들이 발견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지난 2015년 김낙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가 <한국에서의 부와 상속, 1970~2013>라는 논문을 통해 부의 축적 경로와 거기에 영향을 미친 요인들을 규명한 연구 사례를 통해 이 문제를 살펴보자.     


이에 따르면 연간 상속액 규모가 1970년대에 국민소득의 5.7퍼센트를 차지했다가 1980년대 5.0퍼센트로 떨어져 바닥을 찍은 후 계속 상승해 2010년 이후 8퍼센트로 높아졌다. 시기별 부의 축적에 기여한 상속 비중의 추이도 이와 비슷했다. 1970년대 37퍼센트를 차지했던 상속 비중은 1980~1990년대에 이르러 27~29퍼센트로 떨어졌다가 2000년대 42퍼센트로 급상승했다.      


김낙년은 전체 부의 축적에서 상속이 차지하는 비중의 상승 추세가 향후 수십 년간 고령화가 본격화하고 저성장이 예상되는 기간 내내 가속화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상속받은 수저 색깔이 개인들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결정하는 계급주의 논리가 본격적으로 펼쳐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같은 수저계급론의 등장에는 무엇보다도 교육이 계층이동의 사다리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소득과 기회의 배분마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현실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아울러 세계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가운데 고도성장기가 끝나면서 사회적 지위보다는 경제적 지위를 추구해야 하는 생존사회로의 이행이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는 점도 수저계급론의 등장에 일조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김경근・심재휘(2016), 위의 글, 2쪽.     


이런 구조적 차원의 난점들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메리토크라시를 정당한 기제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가령 위에 언급한 김경근과 심재휘의 논문을 살펴보면 성적에 따른 능력 차별이 정당하다는 시각이 학생들 사이에 확고한 신념으로 자리잡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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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근과 심재휘는 전국 16개 시・도 중학교 1학년~고등학교 3학년 학생 1212명을 대상으로 능력주의 태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 간의 구조적 관계를 분석하였다. 이를 위해 중・고등학생의 능력주의 태도가 자기이해(self-interest)를 충실하게 반영하여 학업성취나 사회경제적 배경에 따라 달라지는가, 중・고등학생의 능력주의 태도 결정기제가 학교급에 따라 다른가 등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자료를 분석하였다.     


이들이 청소년의 능력주의 태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유추한 것은 네 가지였다. 부모 교육수준이나 가구소득과 같은 사회경제적 배경, 성별・가정배경 등을 준거로 결정되는 주관적 계층의식, 학업성취, 미래의 가능성과 관련되는 미래 전망, 가치관이나 태도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발달단계가 그것이다.     


연구 결과를 보자. ‘능력이나 업적에 따라 보상을 다르게 받는 것은 당연하다’(능력주의 태도)는 항목이 평균 2.917점(4점 만점), ‘합격자를 선발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성적’(2.623점), ‘장학금을 줄 때 가정 형편보다 성적 고려’(2.436점) 등으로 중간 값(2점) 이상의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 여기에는 가구소득, 주관적 계층인식, 학업성취도, 부모 교육 수준 등 환경적인 요인의 영향이 거의 없었다.     


김경근과 심재휘는 이를 계층인식과 학업성취도가 낮을수록 능력주의를 믿지 않을 것이란 기존 가설을 벗어난 결과로 해석했다. 능력주의가 중・고등학생들 사이에서 계층적 배경이나 학업성취의 우열과 다소 무관하게 초계층적 규율체제로 자리를 잡고 있을 개연성을 시사해주고 있다는 것.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경근 교수는 “‘금수저’든 ‘흙수저’든 능력에 따라 대접받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는 뜻”이라고 평가했다.     


한국 중・고등학생들의 능력주의 태도는 본인이 인식하고 있는 주관적 계층이나 성취수준과 거의 무관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능력주의 태도는 학교급이 달라도 절대적 수준이나 결정기제 측면에서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이는 능력주의가 한국 중・고등학생의 내면세계를 확고하게 지배하는 일종의 ‘마음의 습관’ 또는 심리적 규율체제로서, 이것에 대한 예외를 요구하는 사람이나 실제로 수혜를 입은 사람은 비난이나 폄하의 대상이 될 개연성이 높음을 시사한다. - 김경근・심재휘(2016), 위의 글,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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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서울대학교 학내 커뮤니티에 ‘지균충(지역균형+벌레)’, ‘기균충(기회균등+벌레)’ 등의 말이 잇따라 올라오면서 큰 논란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사회통합을 목적으로 사회적 약자 계층에 속한 학생들을 배려하기 위해 개설한 전형 제도나 지역 간・계층 간 차별 해소를 감소시키기 위해 만든 대학입시 제도들이 일종의 ‘낙인효과’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것이다. 해당 학생들이 극도로 위축된 채 학교 생활을 하고, 비하와 극심한 차별 구조 속에 놓이게 된 상황의 이면에 메리토크라시에 대한 과도한 ‘믿음’이 담겨 있는 게 아닐까.

    

김경근과 심재휘는 메리토크라시가 불완전한 제도라고 단언한다. 개인의 능력은 부모의 사회경제적 배경이나 학생을 둘러싼 사회적 자본의 영향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 때문에 개인들 간의 능력(실력) 차이를 노력 부족에서 찾거나, 메리토크라시를 기계적으로 적용하게 되면 계층 고착화를 피할 수 없게 된다는 이유에서다. 계층 이동의 역동성을 구현할 수 있는 방안을 좀 더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할 것이다.


* 제목 커버의 배경 이미지는 <노컷뉴스>(http://www.nocutnews.co.kr/news/4495675)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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