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10대를 아느냐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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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어떤 교사를 ‘볼매(볼수록 매력 있는 사람)’로 여길까. 많은 교사가 아이들에게 더 많은 교과 지식을 전달하고, 아이들 성적을 올리는 데 관심을 쏟는다. ‘공부하라’는 말이 무시로 나온다. 배움과 공부로부터 멀어진 아이들에게 그 말이 귀에 들어올까.
청소년 문제 전문가들은, 학습에 관심이 없는 아이들에게는 가장 우선적으로 기본 생활 습관이나 태도에 대한 교육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기본적인 인간관계나 삶의 태도 등을 아이들에게 잘 보여주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교과 공부는 이들 문제가 어느 정도 잡혔을 때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 많은 선생님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 공부와 성적이 중요하다는 사실에 이끌려 그것이 학생의 전부인 것처럼 여긴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아이들과의 소통 문제다. 소통(疏通)은 기본적으로 트임, 막힘 없음을 전제로 한다. ‘疏’라는 글자가 그렇다. 이 글자의 어의는 ‘트다, 막힘이 없이 통하다’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이 글자에는 이와 전혀 다른 뜻이 있다. ‘멀다, 친하지 않다’. 나는 소통을 이렇게 해석한다. 관계가 멀거나 친하지 않은 이들과 사이를 터서 막힘 없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
멀거나 친하지 않은 상대와 소통하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는 자세다. 개방적이고 유연한 자세로 상대를 맞이하는 일이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는 태도는 기본이다. 그 모든 것을 위해서 상대방과 소통하려는 주체는 자신을 비워야 한다.
교사 역시 마찬가지다. 학교 현장을 보면 자연스러운 소통보다 권위적인 통제를 앞세우는 교사들이 적지 않다.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를 강요한다. 입으로 소통을 말하면서 마음의 문을 닫고 산다. 자신의 생각과 기준을 앞세우며 아이들을 멋대로 판단하고 평가한다.
아이들은 어느 한두 가지로 쉽게 판단하고 평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예단은 섣부르기 마련이며, 따라서 그것은 제1의 금기처럼 취급되어야 한다. 아이들뿐이랴. 대체로 우리는 개별 인간 존재의 전모를 파악하는 일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잘 모르는 법이다.
교사들은 다른 족속 같다. 아이들을 함부로 판정한다. 그것으로 모자라 특정한 무리의 아이들을 하나의 범주로 묶어 바라본다. 낙인 작업과 차별적인 대우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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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이른 아침부터 한 선생님과 논쟁 아닌 논쟁을 벌인 기억이 생생하다. 같은 학년에서 일하는 성 선생님(가명)이었다. 우리 반 아이들 전체가 엉망인 것처럼 말했다. ‘정말 그렇냐’고 되물었다. 그때부터 목소리가 높아졌다.
“전부는 아니고, 적어도 3분의 2가 그랬다니까요. 그래서 반 전체에 벌을 줬어요.”
금방 ‘전부’에서 ‘3분의 2’로 줄긴 했지만 가만 놔둘 상황이 아닌 듯했다. 나는 격하게 반응했다. 학교가 군대냐, 문제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있으면 그 아이들만 따로 불러 이야기해야 하는 거 아니냐, 어렵더라도 차분하게 다독이면서 대해야지 애먼 얘들까지 함께 묶어 벌을 주는 게 교육적이냐며 따지듯 말했다.
나는 성 선생님이 내게 일부러 와 말한 의도를 잘 알고 있었다. 아이들을 우선 믿고 말로 타이르는 내 ‘스타일’에 딴지를 걸고 싶었던 것. 성 선생님 말을 두루 종합하고 이를 통해 유추해 보면, 내가 아이들에게 야단을 치거나 혼을 내야 할 때도 감싸고 있는 것처럼 여기는 듯했다. 그는 아이들을 잡을 때 확실히 잡고, 풀어줄 때 확실히 풀어줘야 한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잡는다’, ‘풀어준다’는 말들을 다시 떠올려 본다. 권위적으로 윽박을 지르거나, 경우에 따라 체벌도 주면서 아이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자는 것이다. 잘하는 모습이 보이면 그것을 ‘조건’으로 관용을 베푼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당근과 채찍론’이다. 교육적일까. 어린 학생들을 대하는 어른 교사가 교육자로서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일까.
나는 ‘성 선생님이 평소 아이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생각해 보셨어요?’ 하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성 선생님을 포함해 우리 반 수업에 들어가시는 선생님들이 우리 반 전체를, 아니면 우리 반의 장난꾸러기나 말썽꾸러기들을 특정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까 두려웠다. 그런 시선이 두루 널리 퍼져 반 이미지가 굳어지고, 아이들이 그로 인해 집단적으로 상처를 받는 게 걱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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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들은 10대 아이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아이들을 대하는 교사들의 태도에 문제가 없을까. 성 선생님은 당근과 채찍으로 아이들을 다룰 수 있다고 여기는 행동주의자로 분류할 수 있다. 학교에는 이런 선생님들이 아주 많다. 우등생에게 편애와 관심을 주고, 말썽을 피운 아이 앞에서 일벌백계를 외친다. 그들 앞에서 아이들이 ‘도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10대 아이들의 뇌는 불완전하고 민감하다.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이자 상담가인 데이비드 월시는 <10대들의 사생활>에서 10대들의 뇌에서 성격의 극적인 변화를 보이는 ‘피니어스 게이지 증후군’이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전전두엽 피질은 뇌의 집행부로 충동 조절 기능을 하는데, 청소년기 동안은 계속해서 전전두엽 피질이 발달하기 때문에 10대들이 어른과 달리 충동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
여기서 피니어스 게이지의 사연을 잠깐 알아보자. 그는 1848년 9월 13일 미국 버몬트 외곽 철로 확장 공사 현장에서 폭파 준비 작업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다이너마이트가 터졌다. 미사일처럼 튀어올라 게이지의 얼굴을 향한 1.4미터짜리 5.9킬로그램 무게의 선로 쇳덩어리가 왼쪽 뺨을 뚫고 머리 위쪽을 관통해 27미터나 나가 떨어졌다.
놀랍게도 게이지는 죽지 않았다. 심지어 의식이 뚜렷했고 고통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곧 마틴 할로라는 젊은 의사가 수술을 집도했다. 건강을 회복한 게이지는 두 달 뒤 직장으로 복귀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좋아했던 책임감 있고 상냥한 태도가 사라졌다고 한다. 게이지는 조그만 일에도 사람들과 싸움을 하고, 종종 거짓말을 했으며, 잔인하고 모진 성격으로 변했다.
여기저기 떠돌며 힘들게 산 게이지는 186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쓸쓸히 사망했다고 한다. 수술 집도의 마틴 할로가 게이지 사후 유족들을 설득해 뇌를 관찰했다. 조사 결과 전두엽의 광범위한 손상으로 인해 “이성적 능력과 동물적 성향 간 균형이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할로의 주장은 그로부터 130년이 지난 1994년 첨단 영상 기술을 통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고 한다.
미완성의 충동 조절 장치를 가진 10대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들을 만나는 교사들의 소통법을 생각해 본다. 어떤 시사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다.
데이비드 월시에 따르면 10대 청소년들은 타인의 얼굴을 보며 감정을 읽을 때, 전전두엽 피질을 이용하는 성인과 다르게 공포와 분노를 관장하는 편도체를 이용한다. 전전두엽 피질이 미완성 상태로 발달 중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로 인한 문제가 심각하다.
10대 청소년에게 있어서 정서를 정확하게 읽는 일은 매우 어려운 과제일 뿐만 아니라 세 가지의 큰 문제가 있다. 첫째는 청소년의 뇌가 정서를 잘못 읽는다는 것이다. 청소년 스스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고 느낄지라도 그들의 뇌는 그 일에 대해 믿을만한 분석을 하지 못한다. 둘째는 편도체에서 나오는 반응은 감정적이므로 객관적이거나 신중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편도체는 반응을 먼저 하고 그 다음에 제대로 생각을 한다. 셋째는 브레이크가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전전두엽 피질이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하므로 정서 충동을 조절하지 못하는 것이다. - 데이비드 월시(2011), <10대들의 사생활>, 시공사, 1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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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월시는 ‘해야 할 일’ 여섯 가지를 10대와의 의사소통을 위한 해법으로 제시했다. 경청하기, 잘못된 해석을 방지하기 위해 어른(부모, 교사)이 느낀 감정을 명확하게 표현하기, 훌륭하고 분명한 의사소통 기술을 모델링하기, 10대의 막무가내식 감정 표출을 예상하고 인내하기, 잘못했을 때 반드시 자녀에게 사과하기, 대화가 격해지고 언성이 높아질 때 잠시 대화를 중단하기 등.
이 모든 일을 하기 전에, 나는 어른들이 폭풍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10대 아이들을 믿고 조용히 지켜봐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특정한 시선에 따라 그 아이들에게 낙인을 찍어 놓으면 아이들은 낙인의 이미지를 따라 성장하기 쉽다. 교사와 부모가 먼저, 그리고 더 많이 아이들을 이해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는 이유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청소년 상담 전문가 중 한 명인 이창욱은 <사춘기 쇼크>에서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님’을 네 가지로 정리해 놓았다. 하나하나 살펴보자.
권위의식은 없지만 기본 예절만큼은 철저히 지키도록 하는 선생님을 좋아한다. 선생님에게는 교육적 권위와 최소한의 격식 유지가 필요하다. ‘나는 선생님이고 너는 학생이니까 이렇게 해야!’가 권위의식과 격식을 모두 내세우는 태도라면, ‘나는 너희들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다. 언제든지 도움을 주겠다.’는 자세는 권위의식은 없지만 격식은 갖춘 태도다. 아이들은 이렇게 격식과 예의를 강조하는 선생님을 존경한다.
아이들은 원칙을 어기지 않는 선생님의 태도를 좋아한다. 사소한 약속도 반드시 지키는 선생님을 좋아한다. 못 지킬 약속을 남발하거나, 계속 ‘예외’를 만들어 내는 선생님은 아이들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한다.
좋은 선생님의 세 번째 유형은 아이들에게 관심과 칭찬을 아끼지 않는 이다. 아이들은, 사소하고 당연한 일에 대해서라도 칭찬을 받으면 무척 좋아한다.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하는 아이에게 ‘○○이가 하는 밝은 인사가 선생님 기분을 좋게 하는구나.’ 하고 말해 주면 아이 기분도 좋아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은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사과할 줄 아는 선생님을 좋아한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잘못한 일에 대해 사과하는 모습이 정말 멋지다고 입을 모은다. 어른인 교사가 먼저 사과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아이들도 잘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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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딱하거나 배배 꼬인 아이들은 불우한 가정 환경이나 권위적인 부모 아래 있는 경우가 많다. 이창욱은 아버지들이 자녀를 ‘나만의 아이’나 ‘회사의 부하 직원’으로 인식하는 것부터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기만의 세계가 더 확고해지는 중학생 이상의 자녀에게는 특히 더 그렇다고 했다. 자녀가 중학교에 입학하면 ‘나만의 아이’가 아닌 ‘사회의 구성원’으로 대접해 줘야 한다는 인상적이다.
10대를 가장 많이 만나는 교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지 않을까. 교사에게 대드는 간 큰 아이들은 권위주의로 똘똘 뭉친 교사들로부터 폭력적이고 모멸적인 대접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다짜고짜 무릎을 꿇리고, 머리를 내려치며, 폭언을 일삼는 교사를 어떤 아이들이 좋아하고 존경하겠는가. ‘괴물’ 10대 뒤에 ‘괴물’ 어른들이 있지나 않은지 찬찬히 돌아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