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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Sep 13. 2016

생각은 말이 아니다

언어의 생성 단계 (1)

1


우리는 매일같이 ‘생각’을 한다. 대부분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다. 가끔 중요한 것도 있다. 잊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건다. 수첩이나 공책에 적어 놓는다. 머릿속에서 순간적으로 언어화하는 생각들도 있다. 파란 하늘을 보며 무심코 ‘하늘이 맑군’과 같은 문장을 떠올린다.


모든 생각이 그런 대접을 받는 건 아니다. 언어의 옷을 입지 않은 채 망각의 늪과 무의식의 바다 깊은 곳으로 끊임없이 사라져 가는 생각이 많다. 언어로 치장해 주고 싶지만 어울리는 말이 없어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단순하거나 복잡한 시각 이미지, 어렸을 적 동네 시장에서 맡은 튀김 냄새를 떠올려 보라. 어린 나를 꼬옥 껴안아 주시던 할머니 품속의 따스함은 어떤가. 이들 ‘생각’은 머릿속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까마득한 옛날 ‘과일’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떠올린 루시 누나의 후손들이 살았던 세상으로 다시 가 보자. 이들은 지금 말이 만들어지기 직전의 세상에 살고 있다. 대상이나 상황에 대한 ‘생각(개념)’은 있지만 아직 언어가 없다. 이들은 그 ‘생각’들을 어떻게 다루었을까. ‘생각’은 어떤 과정을 거쳐 말이 되었을까.


2


우리나라의 진돗개와 북극 설원을 달리는 말라뮤트는 생김새가 딴판이다. 하지만 이들은 생물학적으로 한 무리로 묶인다. ‘개’라는 말로 묶여 불리는 동일한 생물 종이다. ‘개’를 통해 얻게 된 관념적인 심상, 곧 지시 대상의 범주화를 통해 형성한 개념 덕분이다. 


‘개’라는 말이 만들어지기 직전의 세계로 거슬러 가 보자. 그때 조상 인류의 머릿속에 개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어떤 관념적인 이미지가 꿈틀거리고 있지 않았을까. 물론 개념이 만들어졌다고 해서 곧장 말이 생겨났다고 말하기 힘들다. 생각 자체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루시에게 과일의 개념만 있었을 뿐 아직 ‘과일’이라는 소리로 불리는 말이 없었던 것과 똑같다. 개념, 곧 생각이 말로 이어지는 과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3


지구에는 무리를 지어 사는 동물들이 많다. 이들은 적이 침범해 오는 위협적인 상황에서 경고 신호를 사용한다. 버빗 원숭이는 서로 다른 경고 신호로 독수리와 표범 등 천적의 공격을 동료들에게 알린다. 얼룩다람쥐는 18개의 경고 신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닭도 지상의 공격자와 공중의 공격자를 구별하는 경고 신호를 사용한다. 동물들이 천적의 위협에 대응하여 두 가지 이상의 경고 신호를 사용하는 것은 아주 일반적인 현상이다.


‘팬트후트(pant hoot)’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침팬지의 사례나 단어를 사용하는 듯한 코끼리도 흥미롭다. 팬트후트는 침팬지가 ‘우후우후우후후’ 하고 크게 외치는 소리다. 대개 멀리 있는 동료에게 의사를 전달할 때 사용한다. 팬트후트는 침팬지 개체나 침팬지 무리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고 한다. 휴식, 식사, 이동, 과시 등과 같이 사용되는 상황도 다양하다고 한다.


코끼리는 고도로 사회적인 조직 생활을 꾸려간다. 이들은, 한 무리에 속해 있지만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동료를 만나 인사할 때 특유의 소리를 활용한다. 다양한 상황과 장면에 맞는 서로 다른 고유의 소리를 냄으로써 다른 코끼리와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이때 코끼리가 내는 소리는 일종의 ‘단어’와 같은 구실을 한다. ‘코끼리 사전’을 만들기 위해 연구 작업에 몰두해 있는 학자들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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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의 경고 신호나 침팬지의 팬트후트, 코끼리가 사용하는 ‘단어’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지시 대상, 개념, 임의적인 특정한 소리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있다. 예를 들어 버빗 원숭이는 표범과 독수리(지시 대상)를 보면 그들이 천적(개념)임을 나타내기 위해 서로 다른 경고 신호(소리)를 낸다.


먼 옛날 머릿속에 개념을 형성한 우리 조상 인류도 최초의 말을 만들기에 앞서 이와 같은 원시적인 발성 시스템을 활용하지 않았을까. 루시와 살렘, 또는 이들의 먼 후손이 동굴 쪽으로 다가오는 들개 무리를 본다. 루시와 살렘은 ‘들개’를 가리키는 특정한 경고 소리를 외친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이미 ‘들개’의 개념이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면 ‘들개’를 가리키는 경고 소리가 ‘들개’라는 단어의 원시적인 형태가 아니었을까.


루시와 살렘의 경고 소리를 원시적인 ‘단어’로 평가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언어의 중요한 본질 중 하나인 자의성(恣意性, arbitariness)을 보여 준다는 점에 있다. 언어의 자의성은 형식으로서의 말소리와 의미에 해당하는 개념 사이의 관계가 필연적이지 않음을 가리킨다. 루시의 머릿속에 담긴 들개에 관한 개념과 내지른 소리의 관계 또한 필연적이지 않다. 들개의 개념(내용, 의미)과 그것에 결합된 특정한 경고 소리(형식, 표현)는 우연히 결합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개]라는 소리와 현저하게 달랐을지라도 말이다.


우리의 조상 인류가 내뱉은 여러 경고 신호는 오늘날 우리가 쓰는 말과 그 형태가 전혀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본질적인 기능이나 특성은 하나의 온전한 말과 흡사했다. 개념과 소리가 자의적으로 결합되었으며, 그것들이 특정한 상황에서 하나의 단어처럼 사용되었다. 소리도 소리 나름이었던 셈이다.


* 제목 커버의 배경 이미지는 새끼 침팬지다. 인터넷 한국어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wiki/%EC%B9%A8%ED%8C%AC%EC%A7%80)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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