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있는 모든 순간] , [고아 이야기]
가족의 죽음은 그 자체로 재앙이다. 영원한 이별 앞에 우리는 모두 하염없이 무력하고 하염없이 절절하다. 그런데 그 죽음이 예고도 없이 찾아 온다면? 아침까지만 해도 태어날 아기를 위해 이런 저런 계획을 세우던 아내가 갑자기 응급실에 실려가 혼수상태에 빠진다. 생명 연장 장치들을 온몸에 덕지덕지 붙이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그런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마음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작년에 시어머님께서 두차례 암수술을 받으셨다. 암선고 이후 이어진 수술과 치료. 일년 가까이 이어진 그 시간은 지금도 돌이키기 싫은 힘겨운 경험이었다. 수시로 드나들었던 병원은 아무리 자주 와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병원 로비는 연말연시 백화점 마냥 사람들로 북적였고 병실마다 꽉꽉 들어찬 환자들을 보며 세상에 이렇게 아픈 사람들이 많았나 놀라곤 했다.
병원 건물에 있기만 해도 에너지가 점점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웃음 소리를 죽여야 하고 환자의 움직임에 나를 맞춰야 하는 곳. 건강한 사람의 건강함이 괜스레 미안해 지는 곳이 병원이었다. 한번은 병실에서 세안 후 화장품을 바르고 있는데 남편이 나를 툭 쳤다. 스킨을 바르면서 나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얼굴을 크게 두드렸나 보다. 병실 환자들은 며칠 째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있는데 혼자서 시끄럽게 스킨이다 로션이다 바르는 티를 내버린 거다. 생사의 기로 앞에 서있는 분들을 배려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걸 그저 지켜볼수 밖에 없는 가족들. 이들에게는 아무 바램도 욕구도 남아있지 않다. 살수 있기만을, 이 세상에서 함께 호흡할 수 있기만을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생명이 꺼져 가는 아내에게서 기적처럼 아이가 태어난다. 7개월의 미숙아로 세상에 나와 엄마 자궁과도 같은 인큐베이터로 보내진다. 아이의 입과 코에 호흡줄이 달린다. 이제 남자는 두 병동을 미친 사람처럼 뛰어다닌다. 꺼져가는 생명을 조금이라도 붙들수 있을까 해서, 갓 태어난 씨앗이 훅 날아갈까 해서.
생각조차 끔찍한 이 상황을 남자는 하나도 빠짐없이 묘사하고 있다. 덤덤한 어조로 처음부터 끝까지 고집스럽게 이어지는 기록에서 그의 속울음이 들리는 것 같다. 때로는 눈물이나 절규보다, 말없는 시선 혹은 흔들리는 어깨에 더 큰 슬픔이 담겨있다는 걸 이 책은 잘 보여준다.
절제된 슬픔을 잘 보여준 또 하나의 소설.
전쟁과 서커스라는 기막힌 조합이 가슴 따뜻한 이야기가 되었다.
유대익 학살이 극에 달했던 1930년대 유럽. 유대인 뿐만 아니라 유대인을 보호하는 사람들까지 가차없이 죽음으로 내모는 광기어린 이 시절에 독일 서커스단에 숨어 지내는 유대인이 있었다. 서커스 단장은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이 유대인을 끝까지 보호해 주었고 작가는 우연히 그들의 사진을 보고 이 소설을 구상했다고 한다.
전쟁이라는 암흑의 시대에 서커스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며 지친 마음을 달래주었다. 서커스 천막 안에서만이라도 사람들은 고통을 잊고 잠시나마 꿈같은 세상에 머무를 수 있었다. 서커스는 인종이나 국경을 초월해 누구나 무대에 서고 다함께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유대인 탄압은 서커스 천막 안으로까지 번져오고 단원들은 공포와 슬픔 속에서 공연을 이어간다. 삐에로는 활짝 웃고 공중곡예사들은 힘껏 하늘을 향해 날지만 사실 그들의 몸짓은 눈물이다. 서러운 흐느낌이다.
사진 한장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거대한 서사시가 되었다. 이럴때 보면 소설가는 마법사같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그들의 능력이 새삼 부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