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가지가 영어로 뭐지
아내 병원 치료를 기다렸다가 커피를 테이크 아웃해서 주차장으로 갔다. 아뿔싸. 이중주차. 앞에 흰색 차량 한 대가 주차되어 있다. 경사지여서 중립은 아닐 것이다. 주위를 들러본다. 외통수다. 주차 요원도 없다. 잠시 기다려 본다. 안 되겠다. 이중주차의 기본 상식이고 매너인 남긴 전화번호를 보려고 상대차의 앞 유리창으로 간다.
번호가 없다. 조수 쪽으로 간다. 있다. 그런데 웁스다. 아래로 내려서 붙여 놓았다. 도저히 읽을 수가 없다. 의도적이란 느낌적인 느낌. 조금 더 기다려 본다. 안 되겠다. 건물의 대표 격이고 사람의 왕래가 많은 병원에 손님 중에 해당 차량이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전화를 했다.
이때다. 저쪽에서 30대 후반의 남자가 걸어온다. 직감했다. 차 주인이구나. 휴. 다가오더니 쓱 나를 한 번 보고는 차에 오르려 한다. 잠깐. 이건 아니지. 예의를 다하여 점잖게 말했다. “저기 잠깐만요. 나중에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도 이중주차할 때는 차에 휴대폰 번호 정도는 남겨 두시는 게 좋겠습니다.”
어떡하지, 이 남자.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투로 전화번호 남겨 두었다 한다. “잠깐만요. 근데 알아볼 수가 없잖아요, 그럼 무슨 소용입니까? 이쪽으로 한번 와보세요.”라고 말하고 차 앞으로 먼저 걸어간다. 마지못해 그가 따라오며 말한다. 혼잣말로 하는 것 같은데 다 들린다. “영어 학원에 잠깐 갔다 온 건데… shit” 얘기의 본질과 상관없고, 변명도 아니며, 맥락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토익 935점인 나. 미국 회사에서 임원까지 한 나. 마지막 단어까지 다 들린다. Shit. “똥” 이란 뜻이다. 호흡 한번 하고. 붙여둔 곳을 가리키며 “Can you read it?” 오래간만에 영어가 절로 나온다. 이에는 이. 영어에는 영어. 다시 한국말로 말했다. “알아볼 수 있어요?” 그는 멋 적은 표정을 짓고 별 대수냐는 듯 돌아서서 운전석에 걸어가 올라앉으며 문을 닫는다. 텅.
갑자기 전투력 샘솟는다. 뿜 뿜.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이 짜릿한 전율. 따라가서 창문을 노크한다. 뒷 창문이 내려간다. 다시 노크한다. 앞 문 창문이 내려간다. “Something’s missing. You should say Sorry!”.
그러자 그는 목소리를 높이며 말한다. “미안하다고 했잖아요. 아까!” 2단 콤보로 화가 치솟는다. 이건 또 뭐지. 전략인가? 간혹 만나는 본질 흐리기 전략. 사과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그는 했다고 우길 것이다. 했다 안 했다가 주된 문제로 부각된다. 진실공방의 미궁 속으로 빠지는 것이다.
호흡을 한번 더 한다. 그리고 말한다. “했는지 모르지만 저는 못 들었습니다.” 잠시 어리둥절하던 그. 그제야 “미안합니다. 그런데 왜 영어로 하세요? 저, 한국 사람이에요” 웃으며 내가 대답한다. “화가 나서요. 저는 화가 나면 영어가 막 나옵니다.”
정신이 좀 이상한 사람이라는 표정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창문을 올리고 그는 총총히 사라졌다. 혼잣말을 했다. “싸가지없는 놈” 근데 싸가지 없다가 영어로 뭐지?
<싸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