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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문 Apr 29. 2020

비상한 경우엔 비상한 대책을

Desperate times, desperate measures

4살 많은 내 형은 청주에서 합기도 관장을 하고 있다. 그곳에 정착한 지 아마도 30년은 넘은 것 같다. 왜 고향 경주를 떠나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는 청주 MBC의 한 프로그램에 기인으로 출연할 만큼 무예가 출중하다. 가지고 있는 블랙벨트 단을 합하면 동네 마트에서 판매하는 파의 재고보다 그 단이 많을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단만 해도 이러하다. 태권도 5단, 합기도 7단, 검도 2단, 쿵후 2단. 어떻게 5단 7단 같은 단이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아무튼, 합기도 관장을 가르치는 관장이라니. 고수는 고수다.


만나 악수해 보면 손을 잡는 순간 느낀다. 아, 세다. 그러나 무림 고수도 딸에겐 그저 아빠 일뿐이다. 딸이 시집가는 날. 이토록 긴장한 내 형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동네 깡패가 패거리로 덤벼도 썩소 한번 날리며 제압하던 형이었는데 말이다.


아무튼. 나는 이 결혼식에서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축의금 접수대를 맡은 것이다. 매부와 함께 축의금 봉투를 받으면 장부에 이름과 금액을 기록하는 하는 것이 그것. 내 아들에게는 식권 배부의 임무를 맡겼다. “아들아, 전투에는 실패해도 배식에는 실패하면 안 되다는 전설이 있단다. 식권 배부에 최선을 다하여라!”


10시 40분. 자리를 잡고 앉아 봉투를 기다린다. 봉투 봉투 열렸다 하는 마음으로다가. 11시가 되어갈 즈음 하객들이 봉투를 들고 찾아온다. 나는 목례를 하고 봉투를 받고 봉투에 번호를 매긴다. 그러면 내 아들이 묻는다. “식권 몇 장 필요하세요?” 식권을 받은 하객은 돌아선다. 순조롭다. 옆에는 매부가 봉투를 열고 돈을 세며 그 액수를 장부에 기록한다. 인간관계가 금액으로 딱 정리되는 느낌. 5만 원인 관계. 10만 원인 관계. 50만 원, 100만 원인 관계도 간혹 보인다. 뭐니 뭐니 해도 관계에는 머니가 최고.


11시가 넘어가며 식권이 빠르게 소진된다. 부족할 것 같다. 형에게 고하고 신랑 측에 양해해서 얼마간 빌려온다. 그러나 중과부적이다. 아직 예식 시작 전인데 사정이 급하다. 형에게 다시 고한다. 형은 1층 예약실로 급히 가서 식권을 추가로 더 가지고 왔다.


12시가 가까워 온다. 그것으로도 감당이 안 된다. 코로나로 하객수를 낮게 잡은 것이 원초적인 문제. 봉투는 밀려들고 식권은 소진되고. 순간, 형의 매서운 눈이 접수대 왼쪽을 보며 외친다. “저 빈봉투를 이용하라” “예이~” 축의금 빈봉투에 신부 측이라 적고 밑에 비표인 곰 발바닥 도장을 찍었다. 되었다. 이제, 형은 예약실로 내려가서 이 사실을 알리고 조율하면 끝.


휴~ 얼마나 지났을까? 봉투 식권을 들고 몇 분이 나타났다. 입장이 거부되었다는 비보를 전한다. 형을 찾았다. 보이질 않는다. 아마도 형은 예약실 가다 신부 입장 소리를 듣고 급히 예식장 안으로 뛰어갔던 모양. 그렇지 신부 입장이 더 급하지. 어이쿠. 접수대를 아들에게 맡기며 말한다. “아들아, 뒷일을 부탁한다.” 비장하게 말하고 튀어 나간다. “나를 따르시오!”


로비층 식당 입구에 도착했다. 아뿔싸. 그곳에도 봉투 식권을 들고 당황하고 있는 하객들이 더 보인다. 입장하지 못한 하객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표정은 당황에서 짜증으로, 짜증에서 화로 변해가고 있었다. 한시가 급하다. 시간은 이제 내 편이 아니다.


입구에서 식권을 받고 입장시키는 직원에게 사정한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 “정해진 식권 외에는 누구도 입장이 안됩니다.” 이거 염라대왕이 와도 안 될 것 같다. 원칙에 입각해서 안 된다는 것. 이해한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 설 수 없다. 입구의 소란 소리를 듣고 검은 양복의 내부 경호 책임자가 나타났다. 짧은 머리, 각 잡힌 얼굴. 역시 같은 대답이다. “절. 대. 안됩니다.” 그는 돌아선다. 형을 불러와서 확 정리해 버리고 싶다.


때를 같이 하여 소란 소리를 듣고 또 다른 검은 양복이 나타났다. 아까 검은 양복보다 더 높은 직급 냄새가 난다. 역시다. 총괄 책임자다. 간단명료하게 설명을 하고 사정을 한다. 필요하면 현금으로 계산을 하겠다고 했다. 현금도 사절. “그럼 어쩝니까? 저기 저 하객들 굶기고 화나게 해서 돌려보내란 말입니까? 무슨 대책을 강구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는 봉투 식권은 평생 처음이라고 했다. “저도 봉투 식권 발행은 처음입니다. 책임자님도 저도 모두 처음 겪는 일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기존의 원칙은 소용이 없는 거 아닙니까? 주방에 얘기해서 추가 식사인원 감안해서 빨리 음식 더 준비하라고 하시면 안 될까요?” 무전이 날았고 1분도 안되어 새햐얀 주름 많은 긴 모자를 쓰고 세프가 나타났다.


그는 입구의 화난 인원을 보고 당황했지만 관리과에서 지시가 있어야 하며, 지시대로 하겠다고 하며 돌아가 버렸다. 예약실 직원이 내려왔다. 총책임자가 설명한다. 그러자 “계약한 인원과 추가로 예상한 인원 해서 맥스로 다 해드렸잖습니까. 더는 안됩니다. 정 안되면 답례품으로 드리시던가요? 그러니까 예약을 잘하셨셔야죠” 이런 젠장. 그걸 말이라고 하나.


유머가 생각난다. 물놀이하다 물에 빠져 살려달라고 외치는 소년 이야기. 지나가는 노인이 살려달라는 소리를 듣고 와서 하는 말. “물가에서 놀 때 조심을 해야지. 너희 부모가 그렇게 가르치더냐”. 그러자 물에 빠진 소년이 한마디 하지. “그냥 가 10세꺄!”  


“그냥 가 10xx”라고 외치고 싶다. 돌아보자 답례품은 별로 란다. 밥 먹고 싶다고 이구동성이다. 역시 밥이 중요하다. 호흡을 가다듬고 설명을 한다. “코로나 사태로 인원을 적게 예상했다가 최근 확진자가 줄어들고 사회적 거리 두기도 완화되면서 갑자기 인원이 몰리는 것 같은데, 어쩝니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니 누구 잘못인지 따져봐야 지금 무슨 소용입니까? 주방은 관리과에서 오케이 하면 준비할 수 있는 모양이니까, 인원 확인하고 들여보냅시다. 그럼 에브리바디 해피한 거 아닙니까? 인원 늘어 매출 늘고, 식자재 더 들어가니 이 어려운 코로나 경기에도 좋고, 갑시다. 가요. 발 빠른 대응 잘해서 배고픈 하객 먹게 해 주니 예식장 소문도 좋게 날 거 아닙니까. 갑시다. 가요”


총책임자가 관리실 직원에게 말한다. “들여보냅시다.” 드디어 원하는 말이 나왔다. 가자 가자 가자. “근데 누구십니까?” 아놔 이 친구. 흠흠 “12시 예식 신부 측 혼주 이재용의 친동생 이기문입니다. 만약 문제 되면 제가 책임집니다.”


“00명입니다. 맞지요?” “예, 맞습니다.” 이때다. 최초 처음에 무조건 안 된다고 했던 식당 내부 검은 양복이 나타났다. 안에서 나오면서 소리친다. “안돼요. 안됩니다. 정상적인 쿠폰 아니면 입장 절대 안 됩니다.”


그를 향해 나는 말없이 차려 자세를 취하며 오른손을 천천히 올린다. 척. 거수경례를 하면서 속으로 말한다. ‘경호 책임자님, 당신이 맡고 있는 일과 이에 따른 당신의 의견 모두 존중합니다. 다만 특단의 조치로 여기는 정리되었으니 돌아가서 본연의 내부 경호 일을 잘 보시면 되겠습니다.’


당황한 그가 주위를 둘러본다. 관리과 직원, 총책임자가 웃고 있다. 다시 나를 본다. 나와 눈빛이 마주친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는 뒤돌아 안으로 들어가면 무전기를 잡는다. “자리 찾아 드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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