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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문 Oct 20. 2015

도로 위의 판관

블랙박스, 그 고마움에 대하여

월요일 좋은 날씨. 오전 8시 52분. 집 근처 초등학교 사거리에서 신호 대기 중. 유턴하여 택시 승강장 앞에서 둘째를 내려주면 임무 완수. 등교에 늦은 둘째를 차로 태워주라는 존명 하신 마눌님의 명령하에 긴급 작전 수행 중.


유턴을 위해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대가 내차 앞에서 좌회전 깜빡이를 켜고 있는 상황. 이윽고 노란 불에 이어 좌회전 신호가 떨어졌다. 앞차가 부드럽게 먼저 출발을 해서 좌회전을 돌기 시작했다. 나도 유턴을 위해 왼쪽으로 돌기 시작했다.


거의 유턴이 다 되어 갈 즈음 난데없이 차량 한대가 내 차 오른쪽에 출현했다. 꽝. 부딪혔다. 헉. 내가 정차하고 있던 차량을 보지 못했나? 이해되지 않았다. 분명 눈으로 확인했는데.


일단 차량을 세웠다. 큰 충격은 아니었고 둘째는 별 이상이 없어 보였다. 등교시간이 다 되었기에 먼저 학교로 보냈다. 내려 앞쪽 충격 부분을 보면서 둘째가 한마디 하고 횅하니 가버렸다. “와, 제대로 박았네”




시동을 켜둔 채 내렸다. 사고 상대방 차량의 운전자도 내려서 전화를 하고 있었다. 다친 데는 없어 보였다. 다가가서 나도 보험사에 전화하겠다고 말하고, 보험사에 신고했다. 신고하고 한숨 돌리자 불현듯 생각이 났다. 그래, 내차에 블랙박스가 있지. 그리고 상대편 운전자에게 블랙박스가 있는지 물었다. 있다고 했다. 혹시 바로 화면을 확인할 수가 있지 않을까? 차로 갔다. 확인하니 바로 동영상을 볼 수가 있었다.


봤다. 내가 상대방 차를 보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 차는 그곳에 정차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신호를 무시하고 직진으로 돌진해서 유턴으로 돌고 있는 내차를 부딪힌 것 이었다. 상황이 일순 정리가 되었다.


시동을 끄고 내려 상대방 운전자에게 갔다. 연신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다가가서 "신호 위반해서 운전하신 것 같은데요" 했더니, 노란불 이었다고 했다. 이런. 작은 거짓말의 시작이다. 그대로 두면 거짓말은 점점 커져 본인도 다시 주워 담기 어렵게 될 것이다. 서로 불편해질 것이며 나중에 화면 확인하게 되면, 그에게도 좋은 경험을 아닐 것이다.


조용히 말했다. “블랙박스 확인했는데 말씀하신 것과 다른데요? 좌회전 신호로 완전히 바뀐 상태에서 제가 출발했고, 그 이후에 직진한 것으로 찍혀 있는데요” 순간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몇 초의 짧은 침묵이 흘렀다.


“죄송합니다.”



누구나 당황하면 순간 거짓을 말하고 본인을 방어하고 싶은 본능적 충동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때가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다. 사고는 나게 마련인데, 진짜는 이때다. 이때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결이 만들어진다. 인격은 생각이나 지식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취하는 태도와 이에 따라 반복된 행동으로 나타난다.


당황하면 본인 보호를 위해 거짓말을 할 수 있다. 인간이니까. 한 번의 더 기회가 남았다. 증인과 증거로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스스로 밝히는 기회가 그것이다.


증거와 증인 앞에서도 막무가내 모르쇄로 일관하는 사람을 심심치 않게 보는 요즘이긴 하지만. 일단, 이런류는 인간임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니 논외로 하자.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우기지 않았고, 나도 중언 부언하지 않았다. 보험사에서 왔다. 그 운전자는 신호위반 사실을 스스로 인정했으며 100% 과실을 시인했다. 나는 따로 말할 필요가 없었다.


도로 위의 판관, 블랙박스.

고마웠다. 그러나 블랙박스 없어도 되는 세상이면 더 고마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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