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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문 Nov 21. 2015

후배를 위로하며

할말 하는 다양성의 한국 사회를 생각한다.

일본은 강자의 뜻을 거스르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런 자는 사무라이 단칼에 목이 잘려나갔다. 한국사회도 그에 못지 않게 강자에게 거역하지 말라고 줄기차게 가르쳐 온 사회다. 보스의 뜻에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말고 그냥 받아 들이는 것이 미덕이 되었다. 상명하복, 주의를 둘러 보면 볼수록 그러한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생존 방식이 되어 버렸다.


아들이 꼬박꼬박 옳은 소리로 내 행동의 잘못을 지적할 땐, 그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냥 듣기 싫다. 똑똑한게 마땅찮다. 그러나 참고 듣는다. 그가 살아갈 사회는 내가 살아온 그것과 달라야 하기 때문이다. 듣다 보면 화도 누그러지고 이해되며 반성도 한다.


후배의 입바른 소리는 그 정당성과 올바름을 떠나 기분 좋지 않다. 본능적으로 반감과 함께 입가에 맴도는 말이 있다. ‘싸가지’라는 한마디가 불쑥 떠오른다. ‘싸가지’ 없다는 말은 법이요 진리요 정당성이다. 대게 싸움에서 끝판왕의 한마디는 ‘그래, 너 몇  살이야?’다. ‘싸가지’ 또는 ‘너 몇 살이야’, 그냥 듣기 싫고, 나이 어린 너는 무조건 잘못한 것이다.


하지만 후배라고 나보다 못하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고, 나이가 많다는 것과 그 길을 먼저 걸었다는 것이 ‘옳다’로 연결되는 수학적 논리적 근거는 ‘수학정석’과 ‘법학개론’에도 안 나온다.


물론이다. 후배의 의견이 항상 옳을 수는 더 더욱 없고, 선배들의 경험에서 오는 조언이 강력한 힘을 발휘할 때가 많은 것 또한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삶의 지혜이다.


나는 여러 밴드에 가입되어 있다. 대게 학교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밴드이고, 같은 길을 걸어온 사람끼리의 모임이다.


몇 일 전 이었다. 같은 경험한 군대 관련 밴드에서 후배가 선배의 글에 댓글을 달았다. 후배는 선배의 글이 맘이 들지 않았나 보다. 하나의 비판적인 의견으로 보였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갑자기 ‘싸가지’없는 후배, ‘정치적’인 배경, ‘행사 미참여자’에 대한 비난 등의 문제로 발전해 버렸다. 일순, 밴드의 긴장도가 극에 달했다. 이때, 역시나 고참 선배들의 지혜로운 댓글로 잠시 휴전이 성사되었다. 다행이었다. 튼튼한 조직이 건재할 수 있는 이유다.


1주일여 후. 후배가 ‘다양성’에 글을 올렸고, 역시나 비슷한 내용들의 댓글이 달렸다. 다수는 무관심 혹은 침묵했다. 할 말을 하자니 아는 선배, 아는 후배의 얼굴이 어른거리고 인간관계의 그 복잡 미묘함이 앞을  가로막는다. 귀찮기도 하고, 다툼엔 끼어들기 싫으며, 모나지 않게 둥굴둥굴 사는게 좋은 이유일 수도 있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 다수는 알고 있다. 다양성은 우리 사회를 발전시켜온 가치이며,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포기되어선 안된 문화라는 것을.


후배를 위로한다. 또한 후배의 용기를 칭찬한다. 할 말하기 어려운 한국 사회, 특히 후배가 비판하기 어려운 군대 밴드에서 의견을 내 놓을 수 있는 용기를 칭찬한다. 대학 2년 때 고등학교 동문회에서 88학번 신입생이 "이 땅에 선배의 권의 의식은 군부독재와 함께 사라져야 합니다"라고 했던 후배를 나는 기억한다.


아울러 선배의 생각을 존중한다. 행사나 봉사에 참여하며 조직을 이끌고 활성화시키며 다양하고 많은 경험을 바탕으로 후배의 길에 도움을 주는 선배의 지혜를 존중한다. 그때, 그 신입생에 대해 "권위의식은 청산되어야 하나 선배의 권위는 존중되어야 한다"며 제대 후 복학한 야전잠바 입은 선배를 또한 나는 기억한다.


좋고 싫음을 극복하고 옳고 그름에 귀 기울이며 다양성을 인정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응원한다.


우리는 서로 달라도 다 같이 잘 살아갈 수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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