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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문 Dec 05. 2015

첫눈에 대한 단상

서는 곳이 다르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

금요일 퇴근길.  아침 출근길에서 눈길에 미끄러진 사고의 도로는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눈. 낭만적인 단어다.  


1991년 12월, 강원도 홍천 산골짜기에서 군복 입고 맞은 첫겨울. 엄청 춥다. 밤에는 더 춥다. 일직근무. 야간 당직근무와 같은 거다. 일직근무 중 행정실 난로 옆에서 졸다가 손을 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다행히 그날 밤은 바람 없이 포근했다. 새벽 순찰 시간. 막사를 나서서 순찰 중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첫눈이다. 아직 컴컴했다. 시계를 보았다. 5시를 조금 넘었다. 중대 막사로 돌아올 즈음 눈은 함박눈으로 바뀌었다.


눈이 잘 오지 않는 경주에서 자란 나는 눈다운 눈을 보고 그 화려하고도 조용한 눈의 내림에 압도되어 한참을 눈을 맞고 서 있었다. 자연의 위대한 힘이란 이런 것인가? 중대 막사 앞 불빛에 비친 연병장은 그야말로 새하얀 천국의 다름 아니었다.


다시 시계를 보았다. 5시 30분. 아직 기상시간 전이다. 이대로 있을 순 없다. 중대 행정실을 통해 우리 소대에 들어섰다. 전체 기상이다. 이 아름답고 황홀한 순간을 나만 즐길 수야 없지 않은가. 좋은 건 나눠야 한다. 정해진 기상시간 보다 30분 먼저 소대원들을 깨웠다. 이 아름다운 자연을 위해 30분 먼저 일어나는 것이 무슨 대수랴.




갑작스런 기상에 다들 어리둥절했다. 일부는 무슨 큰일이 났다고 생각했는지 얼른 전투복부터 챙겨 입는다.


“야, 밖에 눈이 펑펑 온다. 경치 죽인다. 어서 일어나!!!”


순간 부산하던 동작들이 멈췄다. 정적이 흘렀다. 아차, 뭔가 잘못되었구나. 그제야 부스스 일어난 고참.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육군 꽃 소위를 중대 행정실로 총총히 사라지게 했다. "야, 연병장 눈 치워!!!”


그랬다. 군대에서 눈은 낭만이 아니다. 노동이다. 그 넓은 연병장에는 눈이 있으면 안 된다. 경계초소, 그 초소를 잇는 연결통로 등등. 눈 치워야 할 곳, 부지기 수다. 눈 지겹게 치웠다. 치우고 돌아서면 어느새 쌓여 다시 치우기 시작했던 눈.


낯선 땅, 낯선 곳에서 맞은 첫눈은 그렇게 육군 소위를 당황스럽게 했다.


눈. 그래도 낭만이라 하고 싶다.



초등학교 6학년이 썼다는 시 한편을 소개한다.


첫눈

첫눈이 내린다.

맨 처음 떨어지는 눈은 태어날 때부터 맨 아래에 있던 눈.

맨 아래에 있던 눈은 떨어진 후에도 맨 아래.

눈이 되지 못하고 땅바닥으로 고꾸라져 녹아버린다.


중간에 떨어지는 눈은 태어날 때부터 중간에 있던 눈.

중간에 있던 눈은 떨어진 후에도 중간.

아래의 눈들이 얼려놓은 땅으로 힘들게 쌓인다.


맨 위에 떨어지는 눈은 태어날 때부터 맨 위에 있던 눈.

맨 위에 있던 눈은 떨어진 후에도 맨 위.

아래의 눈들이 빚어놓은 푹신한 땅 위로 상처 없이 떨어진다.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맨 위에서 태어났을 뿐인데

자기들이 전부인 것 마냥 아름답다며 사치스러운 자태를 뽐낸다.


첫날에 내린 진짜 첫눈은 언 바닥을 몸을 내 박으며 물의 파편이 되어

지금쯤 하수구로  흘러들어 억울함에 울부짖고 있는 것은 아무도 듣지 않는다.


난 눈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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