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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문 Apr 07. 2016

나는 파산했다

그러나 사업 실패가 삶의 실패는 아니리라

김정락 사장님 보세요.


오늘도 새벽에 일찍 잠이 깨었습니다. 요즘 이렇게 새벽에 잠이 달아나버리네요. 아직은 이럴 나이 아닌데 하며 웃습니다.


달밤에 체조한다고, 일찍 일어난 김에 옛날 짐들을 정리했습니다. 옛날부터 내 삶의 궤적에 중요한 것들을 모아놓은 파란 상자가 있습니다. 아마도 20년은 더 된 것 같네요. 노란 뚜껑의 라면 상자만 한 플라스틱 박스를 늘 이사할 때마다 잊지 않고 가지고 다닙니다. 힘들 때 가끔씩 열어보면서 힘을 내는 나만의 상자인 것이지요.


오늘은, 예전에 열어볼 때 지나쳤던 2개의 문서가 눈의 띄었습니다. 첫째 문서는 96년 12월 30일 푸른 제강에서 ㈜대우에 보낸 부탁의 공문이고, 두 번째 문서는 97년 4월 14일 ㈜대우에서 푸른 제강에 보낸 양해의 공문이네요. 복사해서 동봉했으니 한 번 읽어 보세요 ㅋ


이렇게 부탁하고 양해하며 아웅다웅 지낸 시간을 이 두 장의 문서를 통해 추억해 봅니다. 세상을 호령할 듯하다가도 쥐구멍에 숨고 싶었던 실수도 하고, 천지사방에 두려울 것이 없었던 그 찬란했던 시간이 생각나서 웃음이 나네요. 지금 생각해 보니, 지금은 대기업 계열사 사장님이시지만 아마도 김 사장님도 그 당시 세계 강관에서 푸른 제강 수출과장으로 오시고 힘든 과정과 시련을 넘어 힘차게 새롭게 시작하셨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어제 개인파산 신청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괜스레 별일 아닌 것으로 아내에게 짜증을 냈습니다. 미친 것이지요. 조신하게 눈치 보아야 처지에, 아내에게 웬 망발 이었을까요? ㅎㅎㅎ 그래도 조금의 신경전이 있을 뿐 다시 하루를 같이 열어 가겠지요.


제가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된 것은 마음의 짐 때문입니다.


2015년 12월 19일은 토요일 이었습니다. 그날은 사장님 아드님의 결혼식 날이었지요. 며칠 내내 참석할까 말까 고민했습니다. 가는 것은 별반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냥 가서 아는 사람들과 인사하고 축하해주고 하면 그만인 그저 일상적인 평범한 결혼식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제게는 그게 간단치가 않았습니다. 당시에 적은 일기를 추신으로 대신해서 고백하며 미안함을 전합니다. 못 낸 축의금은 여기에 동봉합니다. 파산한 마당에 한 푼이 아쉬운 관계로 많이는 못합니다. 그래도 이상황에 5만 원, 많이 한 겁니다. ㅎㅎㅎ 마음이라고 생각하시고 받아주세요.


그리고 다른 종이 한 장을 발견했습니다. ‘급여지급명세서’. ㈜대우 입사해서 받은 첫 월급 명세서. 살짝 눈물이 났습니다. 여기에 동봉하는 이유는 아직도 제 마음은 첫 월급 받을 때의 마음이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는 의지를 담아 보려는 것 때문입니다. 응원해 주세요. 모든 출구는 어딘가로 들어가는 입구임을 믿기에...... [Every exit is an entry somewhere. Tom Stoppard.]


감사합니다.

2016년 4월 5일 식목일이자 한식 아침

이기문 드림(새로운 이름, 마음에 듭니다 ㅎㅎㅎ)


PS :

2015년 12월 21일 월요일. 춥다!!!

아침 07:38. 카톡이 왔다. 김정락 사장. 업계 아는 이흥준 사장의 전화번호를 묻는 카톡이었다. 아뿔싸. 지난 주말 결혼식에 내가 안 온 것 때문에 이렇게 화를 내시는 것은 아닐까 지레 생각했다. 가지 않은 것은 분명 미안한 일이 맞고, 분명 그는 응당 섭섭해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잘못했다. 갈걸…… 그러나 이미 시간은 지났고, 다시 생각해봐도 갈 상태는 아니었다고 스스로 위로해 버렸다.

한동안 성당 가지 않아서 영성체도 못 모시고, 지난주 광주 출장으로 OB대우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는데, 박석로 사장과의 통화에서 지방 출장이 주말까지 이어질 것이라 김 사장님 아들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할 것 같다고 했는데, 어찌… 그러나 정작 진실한 이유는 내 처지에 대한 내 생각이었다. 옛날 아는 분들 만났을 때 이런저런 내 처지에 대한 설명이나 포장해서 말하는 게 싫었기 때문이었다.

가고 싶었다. 그러 나가지 못했다. 내 처지가 멀리 버스 타고 혜화동 성당까지 가서 축하해줄 상황이 아니었다. 지방 출장이었다고 거짓 카톡을 했다. 미안합니다. 김 사장님.

소송 소장을 받은 지 2주일. 시련과 시험받지 않은 관계가 얼마나 허망한 것이냐! 배신감에 화도 나지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다. 성당에 아는 변호사에게 물어봐야겠다. 막막함은 여전하고…… 아~ 심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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