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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은 Aug 22. 2019

엄마의 겉절이 비법을 배우자

엄마 생신상을 차리며


올해는 엄마 음력 생신이 광복절과 겹쳤다. 

해마다 식구들과 외식을 하며 생신을 축하해드렸는데 이번 해는 내가 직접 생일상을 차려야겠다고 진작부터 마음먹고 있었다. 마침 공휴일이니 동생 식구들도 시간 맞추기가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땀을 뻘뻘 흘려가며 음식을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엄마가 직접 만드신 겉절이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약 2주간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며 메뉴를 골랐다.

평소에 내가 하던 요리는 주로 아이 입맛에 맞춘 것들이라 잔치음식을 잘 할 수 있을까 걱정도 있었다. 스파게티나 부대찌개, 규동 같은 음식은 뚝딱 잘 만들 수 있는데 잔칫상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았다. 엄마의 생일상이니 엄마가 평소 좋아하시는 걸로 생각해보았다. 


당연히 미역국과 잡채를 제일 먼저 결정했다.

다음으로 고기메뉴. 엄마는 고기요리를 별로 안 좋아하니까 가장 담백하고 기름기 없는 돼지고기 수육이 좋겠다. 보쌈김치가 필요한데 이건 좀 자신이 없다. 고민 좀 해보자.

다음은 밑반찬. 엄마는 나물반찬을 좋아하신다. 당신이 나물을 잘 무치신다. 뚝딱 만드는 것 같은데 늘 완벽한 맛이 난다. 상에 올릴만한 적당한 여름 채소가 뭐가 있을까. 고민 끝에 가지와 오이무침으로 결정했다. 엄마 맛을 흉내 내기는 힘들겠지만 어쨌든 도전! 표고버섯볶음과 오이냉채도 메뉴에 넣었다. 

무염 명란젓이 있으니까 명란 계란말이와, 사진발을 고려하여 불고기와 호박전도 넣어주었다.


이리하여 생일상 메뉴 리스트가 완성되었다.

가지무침은 미리 연습까지 해보았다. 적당한 크기로 자른 다음 찜통에서 약 5분 동안 찐다. 뜨거운 김이 빠지면 먹기 좋게 자르고 국간장으로 간을 맞춘다. 파, 마늘, 고춧가루, 매실액 등을 넣고 아주 살살 버무려준다. 마지막으로 깨소금 참기름. 예상했던 그 맛이 맞나? 잘 모르겠다. 아닌 것 같은데. 그렇지만 가지를 5개나 사놓았기 때문에 메뉴에서 뺄 수는 없었다. 


잔치음식 준비가 어려운 이유는 손님이 올 시간에 맞춰서 모든 음식들을 완성해야하기 때문이다. 재료들을 미리 손질해놓고 손님들이 오기 전 약 1시간 전부터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여 빠르고 정확하게 조리를 해야 한다. 이 때 주방보조가 있으면 매우 도움이 된다. 딸이 옆에서 훌륭한 보조역할을 해주었다.

수육이 알맞게 삶아졌을 무렵 때마침 손님들이 도착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육을 썰어 상에 올렸다. 준비한 음식들이 모두 나왔고 이제 뜨거운 밥과 국만 담으면 끝이다.


동생이 싱싱한 연어를 포장해서 사왔다. 선명한 주홍빛 연어까지 보태지니 상이 풍성해보였다. 

그런데 이번 생일상의 하이라이트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바로 엄마표 겉절이 김치였다.  

나는 보쌈고기와 곁들일 김치를 결국 친정엄마에게 부탁했다. 염치없지만 그래도 엄마의 김치가 있어야 고기를 제대로 먹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나는 부끄럽게도 김치를 혼자서 담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번 식사자리에서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식구들은 음식이 맛있다면서 골고루 잘 먹었다. 수육도 인기 메뉴였다. 그런데 쌈용 상추, 배추, 깻잎도 곁들여 놓았으나 모두들 엄마의 겉절이하고만 고기를 먹었다. 겉절이는 매운 고춧가루를 갈아서 넣어서 그런지 맛있게 매콤하고 양념이 정말 맛있었다. 배추의 간이 딱 맞고 곁들인 무생채와 부추가 잘 어우러졌다. 


솔직히 내가 10가지도 넘는 메뉴들을 준비했지만 이번 생일상의 일등 공신은 엄마의 겉절이였다. 보쌈고기를 먹으며 동생과 나는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엄마 김치 만드는 법은 꼭 배워둬야겠어!”


엄마의 레시피가 마치 무형문화재처럼 보존해야할 대상이라고 느꼈다. 엄마의 74번째 생신상을 차리면서 문득 생각했다. 

'엄마가 언제까지 건강하게 우리 곁에  계실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겠구나.' 


자식들에게 크게 의지하지 않고 건강하게 잘 지내시니 나는 엄마의 부재에 대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엄마를 위한 밥상을 몇 번이나 더 차려드릴 수 있을까. 엄마가 영원히 우리 곁에 머물 거라 여기지는 않았지만 떠날 수도 있다는 걸 예상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엄마가 만들어주신 김치를 먹으며 갑자기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엄마의 생일상을 준비하면서 나는 행복했다. 에어컨을 켜도 땀이 나는 부엌에서 끓이고 볶느라 고생했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상을 차렸다. 오랜만에 식구들과 큰 소리로 웃고 떠들고 배부르게 집밥을 먹었다.


나는 엄마 생일상을 처음으로 차렸다는 게 부끄러워졌다. 근사한 한정식, 일식 레스토랑을 가야 제대로 대접하는 거라고, 여름에 힘들게 준비하느니 엄마도 그런 음식을 더 좋아하신다고 스스로에게 변명을 하면서. 앞으로는 더 자주 식구들을 초대해야겠다. 

그 때는 엄마의 겉절이 비법 레시피를 미리 배워서 내가 직접 만들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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