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종은 Aug 31. 2019

슬픈 기념품

싱가포르 여행을 마무리하며


싱가포르 여행을 마치고 귀국비행기를 타기위해 창이공항으로 갔다. 출국시간까지 시간 여유가 있어서, 나는 면세구역 내 상점들을 기웃거렸다. 특별한 건 없었다. 노란색 패키지의 TWG 홍차, 호랑이 연고 등이 높이 쌓여있었다. 싱가포르의 상징인 머라이언 인형, 장난감 등도 눈에 띄었다. 포장만 다를 뿐 시내 구경하면서 지칠 정도로 많이 본 것이었다. 갑자기 흥미가 사라지면서 쇼핑도 귀찮고 얼른 비행기가 타고 싶어졌다. 싱가포르에서의 마지막 시간이 흐르던 창이공항 기념품들이 슬프게만 보였다. 


입시를 끝낸 딸과 여행을 하고 싶었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가지 못했다. 한해가 지나고 어렵게 스케쥴을 맞춰서 싱가포르행 비행기를 함께 탔다. 크리스마스 무렵이었는데 당시 한국은 최강 한파를 기록하던 중이었다. 12월에 겨울이 아닌 여름 한가운데 있다니 여행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여행을 준비하던 당시 나와 딸 모두 어떤 경계에서 방황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이는 대학 입학 후 학교에 마음을 주지 못했다. 본인의 입시결과를 아쉬워하면서 재수나 반수를 실행에 옮긴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그 친구들의 성적과 본인 것을 비교할 때마다 목소리가 커졌다. 

나는 어떤가. 근무하던 직장을 그만두고 고군분투 했건만 원하는 직장을 찾지는 못했다. 부지런히 자격증도 따고, 각종 취업관련 교육에 참여하면서 나름 준비도 많이 했건만 나이든 아줌마를 반기는 곳은 없었다. 경력이 많아서, 혹은 경력이 없어서. 거절의 이유는 충분히 많았다.  그런 시간을 보내고 나니 열심히 산다는 게 뭔지 허탈한 생각도 들었다. 


어디든 떠나고 싶었다. 쪼그라드는 자존감과 볼품없이 저물어가는 나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싱가포르로 떠났다. 짧은 꿈을 꾸듯 이국적인 음식을 먹고 쇼핑도 실컷 했다. 야자수가 늘어선 강변을 따라 산책하다가 야외 카페에서 수제 맥주도 마셨다. 저녁이면 하늘 꼭대기 루프탑 수영장에서 야경을 즐기며 수영을 했다. 고급 호텔의 푹신하고 뽀송한 침대 시트에서 잠들며 며칠을 보냈다. 


5박6일 일정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귀국길 택시 안에서 문득 잊고 있던 생각들이 몰려왔다. 다시 나를 마주해야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왜 하필 나는 이 머나먼 타국에 와서 나의 나이듬을 느끼고 있는가. 지금도 싱가포르를 생각하면 창이 공항의 거대하고 화려한 외관과 대비되는 설명하기 힘든 쓸쓸함이 동시에 떠오른다. 손님을 전혀 유혹하지 못하는 물건들에서 나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너무 오래 동안 거기 있어서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어떤 것. 



여행을 다녀온 후 우연히 가수 권인하에 대한 인터넷 뉴스를 읽었다. 그는 유튜버로 활동하고 있는데 조회 수가 꽤 높다고 했다. 왕년의 히트곡을 불러서 업로드했겠지 생각했으나 그게 아니었다. 유튜브 영상에는 자신의 예전 히트곡도 있지만 정작 조회수가 높은 것은 박효신, MC the Max, 윤종신 등 후배들의 최신 곡을 부른 동영상이었다. 

특이하게도 차에서 연습하듯이 노래 부르는 모습을 영상에 담았다.

그는 안전벨트를 매고 닐로의 ‘지나오다’를 불렀는데, 조회수가 350만뷰를 훌쩍 넘겼다. 60세를 넘긴 잊힌 가수가 화려하게 부활하는 것 같았다. 


가창력 뛰어난 가수니까 당연히 최근 노래도 쉽게 소화하겠지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의 라디오 인터뷰를 들어보면 꼭 그런 건 아니었다. 최근 노래들은 예전 노래와 창법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많은 노력과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자신의 예전 창법을 바꾸기 위해 그는 매일 운동하고 공부도 열심히 한다고 했다. 과거의 영광만으로 쉽게 유튜브의 구독자수와 좋아요 수를 얻는 게 아니었다. 


인터뷰를 접한 후 권인하의 노래를 들어보았다. 트렌디하고 감각적으로 들렸다. 이런 결과는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을 즐기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 나이의 앞 숫자가 바뀌던 무렵에 항상 비슷한 진통을 겪었던 것 같다. 삶을 돌아보게 되는 지점들인데 허무함과 중압감이 항상 같이 따라왔다. 열심히 산다는 게 다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은 이 순간들. 


 그러던 중 나는 '천둥 호랑이 창법'이라 불리는 권인하의 노래를 들었다. 긍정적 에너지가 넘치는 것 같아서 좋았다. 20-30대 팬들이 열광하는 이유가 있어보였다. 그의 노래를 좋아했던 나 또한 뭔지 모를 뿌듯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인생은 항상 뒤를 돌아보면 아쉬움이 남는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은 우리를 거기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언제나 말없이 흐르는 시간에 발맞춰 조용히 앞으로 걸어가야 한다. 


다시금 내 나이의 앞 숫자가 바뀌는 시간이 왔을 때 다시 한 번 싱가포르에 가야겠다. 그때의 나는 계절을 거슬러 여름으로 도망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의 겉절이 비법을 배우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