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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은 Dec 17. 2019

냉탕과 온탕

달을 따다


딸은 나에게 냉탕이자 온탕이다.

냉냉하고 무심한 태도로 나를 대하면 냉탕에 몸을 담그는 기분이다. 조잘조잘 수다떨거나 엄마를 챙기는 모습을 보면 나는 어느새 따뜻한 온탕에서 몸을 녹이고 있다. 딸의 냉한 기운은 도무지 적응이 안된다. 괜찮아, 쿨하게 넘어가자 다짐하지만 '다녀왔습니다'라고 한마디 던지고 제방에 쏙 들어가 문을 닫아버리면 내 결심은 늘 실패한다. 나의 바이오리듬의 좌표들이 딸의 말과 행동에 따라 아래 위로 출렁거린다.


딸아이는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학교에서나 방과후 생활에서 나를 성가시게 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숙제나 준비물 모두 알아서 다했다. 내가 퇴근이 늦어져 혼자 집에 있을 때 스스로 밥도 챙겨먹었고 설거지도 곧잘 했다. 학교에서 속상한 일이 있어도 혼자 이겨내려고 애쓰는 편이었다. 가끔씩 속마음을 털어놓을 때도 있지만 이미 상황이 마무리되었거나 자신이 해결방법을 찾았을 때가 많았다. 나는 들어주면 되었다. 호들갑스럽게 흥분하는 일도 별로 없고 친구들과 특별히 감정이 부딪히는 것도 거의 없었다. 가끔은 그런 아이에게 엄마한테 조금만 응석을 부려도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너무 빨리 어른이 된 것 같다고 느꼈다.


아이가 성인된 지금은 다른 종류의 바람이 생겼다. 응석을 부려주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응석을 받아줬으면 하는 마음. 아주 잠시라도 엄마를 생각해줬으면 하는 마음같은 거 말이다. 간단하게 문자나 카톡 하나 보내주면 좋으련만 이녀석은 그런 게 없다.

아이는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던 관심이 전혀 없어보인다. 어릴 때도 무엇이든 혼자 척척 하는 아이었으니 이제 혼자 못하는 일이란 거의 없다. 면허를 못땄으니 ‘운전‘ 정도가 남았을까. 필기와 기능시험은 통과했고 주행만 남았으니 그나마도 곧 가능해질테지. 스스로 해결하는 착한 아이라고 기뻐 날뛸줄 알았건만.

왠걸 점점 아이에게 손 갈일이 줄어드니 서운한 마음이 더 크다.


한달 전쯤 대상포진에 걸려서 고생을 했다. 입술 주위로 작은 수포가 생겨서 병원에 갔더니 대상포진이라고 했다. 수포를 중심으로 얼굴 전체에 생전 처음 경험하는 아픔이 느껴졌다. 극도의 스트레스, 영향 불균형  등이 원인이라는데, 글쎄, 그랬던가? 내 몸에 대해 너무 둔감했었는지도 모르겠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대상포진이라니 덜컥 겁이 났다. 내 몸이 불쌍하게도 느껴졌다. 일주일을 꼬박 항바이러스알약을 먹었다. 통증은 서서히 가라앉았으나 수포가 없어지려면 적어도 2주정도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 사이 딸이란 녀석이 도무지 엄마를 챙길 기미가 안보였다. 엄마는 며칠째 통증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데 이 녀석은 자기일에만 바빴다. 학교 프로젝트로 전시회를 한다나 뭐한다나. 도통 얼굴을 볼수가 없는 날이 많았다. 어쩌다 잠깐 얼굴을 보는 날에도 아이가 나에게 건낸 말은 ‘아, 그래? 약은 먹었어? 약 잘 챙겨먹어’ 이게 다였다.

딸 아이는 이내 핸드폰으로 시선을 옮긴다. 잠시 몇마디 나눴을 뿐인데 화면 가득히 카톡이 쌓여있었고 계속해서 카톡이 무수히 들어오고 있었다. 이후부터는 내가 무 슨말을 하는지 건성으로 듣고 있는게 보였다. ‘응응. 그랬어? 아.’ 성의없이 듣는 둥 마는 둥 몇 번 대꾸하더니 이내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꽤씸하고 미웠다. 엄마는 딸한테 눈꼽만한 상처만 있어도 마음이 아픈데 이놈은 내 몸이 부서져도 눈도 깜짝 안하겠군. 쳇. 아파서 몸이 고생인테 마음까지 너덜너덜. 심신이 난리가 났었다.


어제도 뭔가로 분주한 얼굴로 외출준비를 하더니 나가버렸다. 나는 딸에게 문자를 보냈다.

‘엄마 오늘 늦게 들어올거야.’

‘헐랭? 웅... 오늘 날씨 좋지?’

‘응, 별루 춥지않네. 요즘 학교 시험때문에 힘들지?’

,,,,,,,,(답장 없음)

딸은 요 며칠 과제를 한다면서 매우 부산했다. 뭘 만드는지 용산 전자상가를 들락거리고 동네 전파사도 여러 군데 돌아다니는 듯 했다. 돈이 많이 든다며 가끔 푸념도 했다. 종종 노끈이나 신문지, 클립 등이 집에 있는지 물어봐서 챙겨주기도 했다. 뭘하고 있는지 묻고 싶었으나 신경이 날카로워 보여서 묻지도 못했다.

어느 정도 컨셉을 잡았는지 오늘은 아이의 표정이 한결 여유로와 보였다. 그러더니 밥을 먹으며 묻지도 않았는데 그간 했던 일들을 조잘조잘 설명해준다.


‘산업디자인 수업인데 조명을 만들어 내야되. 나는 달을 테마로 정했거든. 달을 따온 조명이라는 컨셉.’


아. 그래서 저 동그란 달모양 무드등을 두 개 배송시킨 거였구나.


 어렸을  엄마가 읽어줬던게 
'Many Moons' 그림책이 생각났어.
달을 너무 갖고 싶어했던 공주이야기말이야.


나도 생각났다. 아이가 초등학생 때 읽었던 그림책이었다. 도대체 하늘에 있는 달을 어떻게 가져올 것인가. 시름이 깊었던 임금과 그 신하들. 존재감없이 임금 곁을 지키던 어릿광대가 해결책을 내놓는다. 달모양의 목걸이 펜던트를 만들기로 한 것. ‘공주님, 달을 따서 목걸이를 만들었어요.’ 공주는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그렇지만 당장 문제가 생겼다. 밤이 되면 다시 달은 떠오를텐데 그때 공주에게 뭐라고 말해야하나. 궁궐에 학식있는 신하들이 모여서 고민을 했지만 시시한 답변뿐이었다. 해답을 내놓은 것은 공주 자신이었다.


바보야, 이가 빠지면 새 것이 올라오잖아.
달도 똑같아. 새 달이 다시 생기는 거지.’


공주는 참 현명했구나.


내 마음도 공주가 따가지고 간 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주가 가져가버린 달은 공주의 목위에서 빛나고 있다. 그렇다고 하늘에서 빛나야할 환할 달이 사라졌을까. 아니다. 내일이면 새로운 달이 차올라 공주의 방을 비추게 될 것이다.


나는 딸의 냉냉한 태도 때문에 몸이 아픈 만큼 맘고생을 했었다. 달빛이 사라진 것처럼.

한동안 딸이 밉고 아무것도 해주기 싫었다. 내 마음에 딸에 대한 사랑도 사라져버리길 바랐다. 사랑이 사라져버려야 미운마음도 같이 사라질거라고 믿었다.


 아이가 거의 완성단계라면서 자기가 만든 조명기구를 나에게 흔들어 보여주었을 때,

나는 내 마음 속에 다시금 따뜻하게 달이 차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혼자 냉온탕을 오가며 울고 웃던 일들이 한순간 모두 다 녹아버리는 기분.

아 나에게 딸은 너무나 사랑스런 존재였어.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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