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밥이나 먹자고.
“어휴, 언니 때문에 미치겠어요. 엄마가 어찌나 신세한탄을 하시던지. 온갖 정이 다떨어졌다고요. 다시는 언니랑 여행 안 가신다고. 언니는 어쩜 그렇게 한결같은 걸까요.‘
예전 직장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를 오랜만에 만났다. 영선은 카페에 앉자마자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영선의 엄마와 언니가 함께 동남아로 여행을 다녀온게 문제였다고 했다. 두 사람이 왠일로? 의아하고 걱정도 되었지만 한편으로 기뻤다고 했다. 서먹한 둘 관계가 좋아지기를 바랬다고.
영선의 어머니에게 여행의 후유증이 크게 남은 것 같았다. 휴대폰을 열어서 보여준 엄마의 여행 사진은 가관이었다고 했다. 태국의 에메랄드빛 바다가 화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바다가 너무 예쁘다고 느끼며 자세히 사진을 들여다보니 엄마 얼굴이 반쯤 잘려있었다. 얼굴이 살짝 흐릿하기까지 했다. 사진 초점이 엄마 옆에 있는 다른 인물에 맞춰져 있었다.
‘사진 한 장 찍는데도 성의없이 툭툭.
내가 여기 좋다고, 앉아서 사진찍자고 하면
귀찮다고 팽 다른데로 가버리고.
돈 한 푼 안 들고 따라온 온 주제에 식당은 고급으로만 가더라고.
엄마의 속풀이는 끝도 없었다고 했다. 평소 언니가 엄마를 대하는 태도를 알기에 엄마 얼마나 푸대접을 받았을까 충분히 예상이 되었다고도 말했다. 비싼 돈 주고 온 여행을 망쳤다는 기분에 얼마나 속상했을까. 밤늦도록 잠이 안았다고 털어놓았다.
예전에도 영선은 언니에 대해 얘기해준 적이 있었다.
자매는 한 살 터울밖에 나지 않았고 중고등학교 모두 같이 다녀서 언니라기 보다 친구같다고 했었다. 어릴 때부터 영선과 언니는 외모부터 성격 모두 많이 달랐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남다른 발육 덕분에 영선은 늘 언니냐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성인이 될 때까지 언니는 영선보다 키도 작고 가느다란 뼈대에 체구도 더 작았다. 영선은 주변에 친구가 항상 많았다. 놀러다니기 좋아했던 영선과 달리 언니는 늘 혼자있고 싶어했다. 놀러나갈 때마다 언니에게 같이 가자고 물으면 언니는 언제나 고개를 가로 저였다. 그냥 집에 있을래. 갔다와. 답답한 집구석이 뭐가 그리 좋을까. 영선은 언니를 뒤로 한채 주말이면 친구들과 함께 대학가 주변을 누비며 놀았다.
고등학교 졸업 무렵 자매는 서로 다른 길을 택했다고 했다. 언니는 공부를 잘했고 부모님도 언니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고 했다. 영선의 어머니는 언니의 입시에 공을 엄청나게 들였다고 말했다. 엄마 자신은 아니라고 하지만 영선의 눈에는 질투가 날 정도로 시간과 돈과 정성을 쏟았다. 언니는 좋은 내신과 화려한 생활기록부를 갖추고 신촌의 한 대학에 무사히 입학했다. 어차피 공부에 흥미가 없었던 영선은 대학을 포기하고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취업을 했다.
돈을 벌기시작하면서 지금까지 영선은 월급의 절반은 부모님께 드린다고 했다. 엄마는 늘 괜찮다고 하시지만 더 드리지 못하는게 죄송하다고 말했다. ‘더 번듯하고 월급 빵빵한 직장을 다녔다면 좋을텐데.’ 평생 아빠가 벌어온 돈으로 알뜰살뜰 살림하고 자매를 이만큼 키워냈으니 엄마의 남은 인생 즐겁게 사셨으면 좋겠다고, 해를 넘길수록 몸의 이곳저곳이 고장나는 엄마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고 영선은 말했다.
자식한테 줄 영선 엄마의 사랑의 총량이 100이라면 영선의 언니는 그중 90을 받아간 사람 같았다. 언니의 옷, 신발, 가방 등은 모두 백화점 물건이라고 했다. 언니가 사달라고 했다기 보다 엄마가 그렇게 해주고 싶어했다. 큰 딸은 항상 빛나는 존재여야 했으니까. 엄마의 자부심이었으니까.
언니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못한 채 몇 년을 집에서만 보냈다. 바늘 구멍같은 대기업 취업을 포기하고 공무원시험에 도전한다며 노량진 학원을 다녔다. 두어번 낙방하더니 시험공부보다 연애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돌연 결혼하겠다고 부모에게 말했다. 엄마는 큰 딸이 앙상하게 말라가는 모습을 지켜보기 힘들었던지 빠르게 결혼준비에 들어갔다. 변변한 직업도 없었던 신랑감이었지만 언니한테 잘해주기만 한다면 좋겠다고, 언니 마음이 편안해 졌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엄마는 말했다. 영선은 그런 엄마가 이해가 안되었지만 목소리가 떨리면서 고개를 돌리는 엄마를 보고 더 이상 영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했다.
영선은 엄마가 여행에서 사오셨다면서 코코넛오일 비누, 열대과일 말린 것 등등을 나에게 내밀었다.
왜 언니는 자기에게 들어온 복을 저렇게 차버리는 걸까요?
언니가 조금만 엄마에게 잘하면
엄마는 신이나서 몇 배로 언니를 챙겨주실 분인데
언니는 그걸 몰라, 바보같이.
늦은 밤까지 엄마의 하소연을 들어드리며 엄마를 위로했을 영선의 모습이 그려졌다.
결혼하면 달라질 줄 알았어요. 시댁 어른들을 대하면서
언니한테 인생 공부가 많이 될거라고 생각했어요.
결혼한지 벌써 3년이 다되어가는데 하나도 달라지지 않네요.
오히려 점점 더 이기적으로 변하는 것 같아요.’
나는 결혼 3년차라고 사람이 갑자기 변하지는 않을거라고 말해주었다.
나도 그랬으니까. 영선의 얘기를 듣는 내내 나는 영선이 나를 혼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었다. 내가 엄마의 사랑을 얼마나 독차지했었는지, 그런 엄마에게 내가 얼마나 무심했었는지.
동생과 달리 나는 엄마에게 그다지 애교있는 딸이 아니었다. 곰살맞게 안부전화도 매일 드리거나 힘들다고 속내 이야기를 조잘거리는 타입이 못되었다. 내 인생에 집중하느라 엄마가 어떻게 사는지 크게 관심을 두지 못했다. 내가 엄마를 바라봐줄 때까지 엄마는 얼마나 오랫동안 나를 기다리고 계셨을까. 부끄럽게도 나는 너무 오랫동안 그러지 못하고 살았다.
엄마가 나 때문에 많이 외롭고 서운했겠다고 느끼게 된 건 딸이 어느 정도 성장하고 난 후였던 것 같다. 아이를 키우면서 엄마의 마음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너 같은 딸 키워봐야 내 맘 알지.’ 악담처럼 했던 엄마의 말이 생각나는 순간들이 늘어났다. 철없던 시절,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엄마 마음을 아프게 했을 것이다.
자존심 센 엄마가 큰딸한테 내색도 못하고 혼자서 얼마나 맘고생을 했을까. 결혼하고도 한참 뒤에야 나는 엄마를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나라는 인간은 정말 배움이 늦구나. 가방끈만 길다고 잘 사는게 아니었어. 너무 늦어버린 것 같았지만 그래도 엄마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선과 헤어지고 난 뒤 나는 엄마에게 전화할까 하다가 시간이 너무 늦어었다는 걸 깨달았다. 대신 문자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뭐라고 써야하나 한참을 고민했다.
‘크리스마스때 뭐하셔요? 밥 먹을까? 내가 쏠게.
장소는 엄마가 정하시고~ 굿나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