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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은 Jun 14. 2019

소원나무 레드, Home이 되다

Wishtree by Katherine Applegate



* 제목: Wishtree

* 작가: Katherine Applegate

* 출간일: 2017년

* 출판사: Feiwel and Friends

* 페이지수: 215쪽

* 영어레벨: 초등 4-6학년(Lexile 590L)

* 추천연령: 초등 3학년 이상

* 번역본: 소원나무(책과콩나무 펴냄 / 천미나 옮김)




영어로 house와 home은 쓰임새가 다르다. 우리말로 둘 다 '집'이지만, house는 건축물로서의 의미,

home은 정서적 분위기를 포함한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즉, house는 누군가 살고 있거나 비어있는 것과 상관없이 건물 자체로서 기능적 의미가 강하다. ‘빛의 집’은 lighthouse(등대), 물건들의 집은 warehouse(창고), 정신이 아픈 사람을 위한 집은 madhouse(정신병원) 등등.

Home은 삶이 녹아있는 공간으로서의 ‘집’이다.

혼자이건 다수이건 그 안에서 소속감을 느끼고 지친 몸을 눕힐 수 있다면 home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home은 때로 고향(hometown)이며 고국(hometown)이 되기도 한다.


이 책은 소원나무라고 불리는 떡갈나무 ‘레드’의 이야기이다.

이백열여섯 살 된 레드는 그동안 수많은 동물들에게 집(home)이 되었다.


“I’m not just a tree, by the way.

I’m a home. A community.

Folks nest on my brances.

Burrow between my roots.

Lay eggs on my leave.

And then there are my hollows.”

(p. 23)

(나는 그냥 나무가 아니에요. 나는 집이고 마을의 사랑방입니다. 내 가지에 둥지를 틀고, 내 뿌리 틈에 굴을 파고, 내 잎사귀에는 알을 낳는 식구들. 나에게는 푹 파인 구멍도 있지요..)


특히 구멍(hollow-상처가 아문 뒤에 생기는 구멍)은 올빼미, 주머니쥐, 너구리가 어린 새끼를 안심하고 키울 수 있는 공간이 된다.


레드에게는 오랜 친구가 있다. 까마귀 봉고이다.

낙관주의자 레드가 매사에 부정적인 봉고와 오랜 세월 친구사이로 지낼 수 있는 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So Bongo and I agree to disagree.

And that’s fine. We’re very different, after all. '

(p. 15)

(봉고와 나는 동의하지 않음을 동의합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우리는 정말 다르니까요.)


레드 맞은편에도 집이 두 채 있는데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보금자리가 되어주었다.

“Over the years,

many families had called those houses home.”

(p. 54)

(오랜 세월 동안 많은 가족들이 이 주택을 ‘집’이라고 불렀지요.)


그 집에 살던 사람들의 언어나 풍습은 달랐지만 최고의 정원처럼 다채로운 사람들이 어울리며 이웃이 되는 공간이었다.


오랫동안 비어있던 파란 집에 얼마 전

사마르 가족이 이사 왔다.

레드에 눈에 그들은 먼 나라에서 온 것처럼 보였다.

머리에 스카프를 썼고 말투도 달랐다.

이웃들로부터 환대받는 것 같지 않았다.

레드 몸통에 새겨진 ‘떠나라’라는 단어는

레드에게만 상처가 되는 건 아닌 듯했다..

어느 늦은 밤 레드 곁으로 다가와 앉은 사마르는 조용히 울고 있었다.

너무 일찍 세상의 추한 모습을 봐버린 걸까.

‘너무 많은 것을 본’ 것 같은 얼굴의 소녀 사마르.

아이의 손에는 소원 천조각이 있었는데

레드의 나뭇가지에 묶으면서 이렇게 속삭였다.


“I wish,” she whispered, “for a friend.”

(p.32)

(내 소원은 친구를 갖는 거야.)


사마르는 동물들과 금세 친구가 되었지만 바로 옆집에 사는 스티븐과 친구가 되지 못했다. 학교 친구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 사마르 가족이 사는 집은 home이 되지 못했고 마을 한가운데 고립된 외로운 섬처럼 보였다. 가족은 그곳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20008년 우리 식구는 미국에 사는 친지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 가족의 집은 도심에서 벗어난 주택단지 내에 있었다. 큰길을 벗어나 단지로 이어지는 진입로부터 조경이 잘 되어 있었다. 공기도 맑고 새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진입로를 조금 달리니 2차선 도로를 따라 비슷하게 생긴 2층 집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아파트가 빽빽하게 들어선 우리 동네 풍경과 너무 달라서 ‘나도 이런 곳에서 한번 살아봤으면’ 하고 생각했다.

친지분은 우리를 위해 맛있는 한식을 차려주셨다. 그런데 요리로 바쁜 와중에도 환기에 무척 신경을 쓰고 있었다. 냄새가 과하면 옆집에서 불만이 들어올 수 있어서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조심해도 음식 냄새라는 게 공기 중으로 퍼지기 마련인데, 나는 신경이 쓰여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런 문제로 이전에 이웃과 언쟁이 있었는데, 이후로는 청국장이나 된장찌개는 되도록 먹지 않는다고 했다.


한 사람의 생활 습관이나 문화적 배경이 누군가에게 불쾌함을 일으킬 수도 있다.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노력하는 게 마땅하다. 다만 내가 상대를 위해 내 것을 포기한다면 상대도 나를 위한 배려의 마음을 보여주기를 기대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런데 그 동네에서 일어난 다른 일을 들어보면 딱히 그런 것 같지 않았다. 한 번은 집에 놀러 온 손님이 차를 골목에 세워두고 하룻밤을 묵었는데 다음날 손님 차에 누군가 각종 소스를 뿌려놔서 너무 놀라고 민망했던 경험이 있다고 했다. 낯선 차가 골목을 차지하고 있는 게 못마땅했는지 다소 유치하고 과격한 방식으로 거부감을 드러낸 듯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친지분은 동네 사람들 모두가 범인같아서 한동안 마음이 무거웠다고 말했다.


온전히 환영받지 못한다는 느낌으로 산다는 건 어떤 걸까. 맑은 공기와 쾌적한 동네 분위기를 잠시 부러워했지만 그들이 감수해야 하는 것은 미처 보지 못했다. 나는 그들의 삶을 아주 잠깐 조금 들여다봤을 뿐이지만 이민자로 살아가는 가족의 고충이 말하지 않아도 전달되는 것 같았다.


이 책에서 파란 집 사람들에 대한 미움이 사라질 수 있을까에 대한 결말은 열어두었다. 사마르 가족은 이사 결정을 잠시 미루었지만, 여전히 이웃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내가 미국을 다녀온 지도 10년이 넘었지만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배려하는 마음은 생각만큼 쉽게 생기지 않는 모양이다.


레드는 나뭇가지에 소원을 다는 모든 이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랐다. 터무니없는 소원일 때도 있었지만 어떤 소원도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었다. 자신을 찾아오는 모든 동물들에게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준 것처럼, 길 건너에 있는 저 두 집도 언젠가 따뜻한 Home이 되기를 레드는 바랐다. 하지만 레드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소원이 이루어지려면 상처가 구멍이 되고, 다시 동물들의 아늑한 집이 되는데 필요한 만큼의 ‘시간과 사랑과 희망’이 필요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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