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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lla Apr 13. 2024

2화: 대기업 1년차 주재원 김재희

 대기업 뉴욕 지사에서 파견 근무 중인 1년차 주재원입니다.

 


해당 글은 뉴욕 맨하튼을 배경으로 한 소설로 실제 인물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소설 내 모든 사진은 직접 촬영했습니다.


오후 3시 30분. 오후 반차를 낸 재희는 링컨센터 근처의 요가 스튜디오로 향하고 있었다. 최근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기에 요가를 통해 마음을 다스리고 싶었다. 아침부터 비가 내려 살짝 추운 느낌이 들었다. 따뜻한 요가 스튜디오에서 몸과 마음을 녹이고 싶었다. 재희는 현재 한국 대기업 뉴욕 지사에 파견나와 있는 주재원이다. 그녀는 1년 전, 뉴욕 지사로 발령을 받았다. 3년 파견 근무였다. 모두가 재희를 부러워했다. 재희는 뉴욕 한복판에서 요가 스튜디오로 향하고 있는 자신의 상태가 매우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동시에 환율 걱정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재희의 회사는 매달 원화로 월급을 지급하였다. 해외 지사로 파견을 갔지만, 원 소속은 국내 기업이었기에 회사 정책 상 원화로 월급을 지급받아왔다. 원달러 환율이 1,400원임을 확인한 순간부터는 마음이 계속 무거웠다. 요가 스튜디오로 걸어가는 길, 그녀의 머릿속엔 그녀의 부모가 스쳐지나갔다. 남들에게는 아직까지 말하지 않은 그녀만의 기억이었다.


    재희는 국내 중상위권 대학을 졸업하였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우수한 내신 성적을 유지하였으나, 수능 시험 성적은 결코 만족스럽지 않았다. '재수는 절대 시켜줄 수 없다.'는 완강한 그녀의 아버지 덕분에 재희는 재수의 기회도 갖지 못하였다. 반수를 준비해볼 생각도 해봤지만, 수능 준비를 위해 학교를 휴학하는 것은 재희에겐 큰 부담이었다. 재희에게는 반수 또는 재수를 준비할 만한 금전적 능력이 없었다. 대신, 그 시간에 학부 학점을 올려 좋은 회사에 취직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대학교 입학 후, 1년, 2년이 지날 수록 자신보다 고등학교 석차가 낮았던 친구들이 재수 등을 통해 국내 명문대학에 합격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심각한 우울감이 찾아오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마음먹고 독하게 공부를 하였다. 덕분에 대학교 동문 친구도 없었다. 토익 970점, 오픽 IH, 그리고 상위 5%의 학점이라는 스펙과 함께 현재 재직 중인 대기업 계열사에 합격하였고, 입사 후에는 경영전략팀으로 인사발령을 받았다. 입사 2년차 때는 발탁 승진의 기회도 주어졌다. 우수한 실적으로 인해 회사 내부에서 상도 여럿 수여받았다. 친한 동기는 한명도 없었다. 그래도 재희는 열심히 살아온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한국에서의 생활은 감옥과도 같았다. 재희의 아버지는 국내 사립대학교 경영학과 교수이다. 그녀의 아버지 직업을 아는 사람들은 재희를 금수저 또는 부잣집 딸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재희가 재직 중인 회사에서도 재희를 '사립 대학 교수 딸', '금수저'로 알고 있었다. 신입사원 때, 인사팀과의 회식 자리에서 인사팀 대리가 그녀의 아버지 소속 대학과 직위를 얘기한 이후로 입사 동기들 사이에서 그녀의 뒷배경에 대한 소문이 돌았다. 경영학과 교수인 아버지의 연줄을 타고 입사하고 좋은 부서에 배치된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하지만 재희의 현실은 달랐다.


    고등학교 3학년 재학 당시, 재희의 부모는 갑작스럽게 이혼을 하였다. 원래부터 사이가 좋은 부부는 아니었지만, 한참 예민할 시기 부모의 이혼은 재희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고등학교 내내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던 재희는 공부 의욕을 잃었다. 이혼 직후, 재희의 부모는 각자 새 가정을 이루었고, 재희는 그녀의 아버지와 살게 되었다. 재희의 아버지는 재희에게 별다른 애정이 없었지만, 자신의 전처에게 양육비를 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재희를 데려갔다. 재희의 아버지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아왔다는 여자와 재혼을 하였다. 계모는 재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였다. 팀 프로젝트 과제를 하느라 10시가 넘어 집에 들어가면 "지 엄마 닮아가지고 정신 못차리고 남자나 만나고 다니나보네." 등의 온갖 비난을 쏟아내곤 했다. 또한, 계모는 재희의 중상위권 학부를 비난하곤 하였다. "그딴 학벌로 니 주제에 무슨 대기업? 나 아는 사람 통해서 그 사람 회사에 취직 시켜줄게. 니가 나한테 잘 하기만 하면." 등의 말을 하며 재희에게 가스라이팅을 반복적으로 하곤 하였다. 대학교 2학년 재학 당시엔 "야, 니가 뭔데 니네 아빠한테 용돈을 받냐? 다른 애들은 다들 아르바이트 하면서 학교 다녀. 명문대생도 아닌 주제에 부끄럽지도 않냐? 니 돈은 니가 알아서 좀 벌고 다니자?" 등의 말을 하며 재희의 용돈을 끊기도 하였다. 당연히 다른 대학 동기들과는 달리 재희는 어학연수나 영어학원은 꿈도 꿀 수도 없었다. 재희가 친모를 만나 선물이라도 받아오는 날에는 난리가 났다. "야! 너 지금 내 집에서 살면서 니 엄마가 준거 받아왔냐? 그걸 감히 우리 집 안으로 끌고 들어와? 당장 나가!" 등의 말과 함께 폭언을 하며 친모의 선물을 훼손하거나 재희의 얼굴을 향해 음식 그릇을 던지기도 하였다. 재희의 친부는 그런 계모를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동조를 하곤 하였다. 재희의 친부에겐 재희의 친모와 외모가 똑닮은 재희의 존재가 끔찍하게만 느껴졌다. 아들도 아니고, 그렇다고 명문대를 입학한 것도 아니라 자랑거리조차 아닌지라, 짐짝에 불과했다.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은 재희의 친모의 존재였다. 다행이도 재희는 친모의 도움을 받아 대학 재학 기간 동안 토익과 오픽 학원을 다닐 수 있었고, 용돈을 받아 학업에 전념할 수 있었다. 재희에겐 "대기업 취직. 그리고 독립"만이 탈출구이자 최선의 길이었다. 대학생활이라는 사치는 누릴 수 없었다.

같은 경영학과 동문들 중, CPA(공인회계사 시험)을 준비하는 친구들도 있었으나, 그녀에겐 CPA 시험 준비조차 사치였다. 그녀의 친부와 계모가 그녀의 CPA 수험 기간을 지켜봐줄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물론 재희는 과탑도, 토익 만점도, 명문대 졸업자도, CPA 합격자도 아니었지만, 최선을 다하였고, 대기업에 합격도 하였다. 비로소 자신감이 생겼다.


물론, 대기업 취직 후에도 바로 독립을 할 수는 없었다. 재희는 모아놓은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계모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작은 오피스텔을 얻을 수 있게 1천만원을 빌려주겠다. 대신 차용증을 쓰고 이자를 꼭 지급하여라."는 내용이었다. 재희는 이를 거절하였다. 차라리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리는 것이 낫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녀는 자신의 월급으로 보증금 1천만원을 모을 때까지 최대한 버틴 후, 보증금 1천만원, 월세 30만원 짜리 쪽방을 구하여 독립하였다. 친부와 계모는 재희의 독립을 반겼다.


    재희는 워커홀릭이었다. 동시에 다른 동료들보다 업무처리 속도도 빨랐다. 그만큼 성과는 좋았다. 열심히 사는 것. 그리고 최고의 성과를 내는 것. 그것이 바로 재희의 생존방식이었다.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도 않았다. 재희는 동료들과 술자리를 가지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도, 업무 컨디션을 망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의 우선순위는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노력의 대가가 성과로서 눈에 보이는 순간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재희의 업무 능력을 아는 이사 및 수석들은 재희를 매우 아꼈다. 하지만, 재희의 일부 동료들의 생각은 달랐다. 살갑지 않은 재희의 성격은 종종 뒷담화의 대상이 되곤 했다. 재희의 동료들이 대부분 명문대학 출신임을 감안할 때, 그들은 알게 모르게 재희를 무시하곤 했다. 그들에게는 재희의 모습이 그저 독하게만 보였다. 학벌의 한계로 막상 회사에서 큰 자리는 차지하지 못할텐데 괜한 수고를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들의 눈에 재희는 끊임없이 물 밑에서 발길질을 하는 오리였다. 또한, 그녀의 동료들은 명문대학 경영학과 교수인 그녀의 친부가 그녀의 회사 생활에 영향력을 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녀의 세상을 알 수 없던 그들에겐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그들은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의 성과가 단순한 운이라거나 상사들이 그녀의 아버지와의 연줄로 인해 재희를 챙겼기 때문이라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재희 역시 이러한 소문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해명을 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그럴수록 회사에서 더더욱 좋은 성과를 내고 그녀의 능력을 보여주고 싶었다. 수능이라는 하루의 시험으로 인해 중상위권 학벌을 갖게된 재희로서는 그들이 괜히 명문대 학벌을 가졌다는 이유로 자신에게 텃세를 부린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재희는 회사 동료들과도 점점 멀어져갔다. 회사 내에서도 가정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인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재희에게 미국행은 새로운 기회였다. 답답한 인생에서의 탈출이었다. 재희는 미국에서의 3년을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보내고 싶었다. 지금까지 해보지 못했던 여행도 마음껏 다녀보고, 연애도 해보고 싶었다. 친구도 사귀어보고 싶었다. 소극적이고 우울한 성격을 바꿔보고싶었다. 재희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이곳에서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생활하고 싶었다.

커리어적인 욕심도 있었다. 미국 지사에서 3년의 주재원 생활을 마친 후엔 국내 명문대에서 야간 MBA 과정을 수료하고 그룹 경영전략본부로 이직하는 것이 목표였다. 비록 명문대를 졸업하지는 못하였지만, 그녀는 조금씩 노력한다면 단계를 밟아나갈 수 있을거라고 믿고 있었다.

또한, 일탈도 꿈꾸고 있었다. 재희는 국내 대기업 재직 당시 5년 동안 같은 원룸에서 살며 돈을 모아왔다. 부동산에 투자를 할 만한 시간도, 주식에 투자를 할 만한 시간도 없던 그녀는 그저 저축만을 해왔다. 명품에도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녀의 월급, PS, PI는 통장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녀는 모은 돈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보기로 마음먹었다. 맨하튼에 집을 얻는 것! 그것이 그녀의 첫번째 일탈이었다.


뉴욕 맨하튼 월세는 만만치 않았다. 한국 월세와는 비교할 바가 되지 않았다. 그녀의 원룸 월세는 수백만원에 달하였지만, 그녀는 일생에 한번 있을 뉴욕에서의 삶을 위해 과감히 투자하기로 하였다. 지금까지 회사를 다니면서 모아놓은 돈과 앞으로 받을 월급 및 일부의 주재원 지원금 등을 고려하면 충분히 가능했다. 그녀는 일탈 첫번째 계율에 따라 센트랄 파크와 허드슨 강이 내려다보이는 어퍼 웨스트 아파트 10층의 원룸을 구하였다. 자신을 위해 큰 돈을 써본적이 없는 그녀로서는 큰 도전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처음 맞이하는 진정한 자유이자 삶이 시작되었던 것이었다.



오후 4시. 링컨센터 인근에 위치한 요가 스튜디오에 도착하였다. 접수대 직원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며 접수를 한 후 원하는 자리를 배정받았다. 매우 간단한 영어였지만, 혹시라도 발음이 틀려 영어를 못하는 사람처럼 보일까봐 긴장을 하였다. 순수 국내파인 재희는 항상 영어가 문제였다. 미국에서 수개월 째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통 영어가 늘지 않았다.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 마신 후, 숨을 크게 내쉬고. 다시 한번 반복해주세요.

미간 사이의 힘을 풀고 턱의 힘을 푸세요.

긴장 되어 있는 어깨의 힘을 풀고 다시 한번 숨을 마쉬고 내쉽니다.

이 순간은 생각을 떨쳐내시고 현재에 집중합니다. 나와 나의 몸의 반응에 집중합니다.


요가 강사가 거듭되는 설명을 하며 '긴장 풀기'를 강조하였으나, 재희는 그녀의 영어를 따라가기에 바빴다. '숨을 뱉으라는거지?'. 현재에 집중을 하라는 설명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평소보다 더욱 많은 생각들이 그녀의 머릿 속을 스쳐갔다. 부성애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그녀의 친부, 가스라이팅을 일삼던 그녀의 계모, 환율, 그리고 카톡을 1시간 넘게 씹는 소연까지. 다양한 생각들이 떠오르며 명상의 시간이 스트레스로 가득 찼다. 긴장을 풀고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 요가 스튜디오를 찾아왔으나, 더욱 번뇌를 쌓아가는 느낌에 스트레스가 쌓였다.


후우!

그녀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조금은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스스로를 진정시키자 60분의 시간은 빨리 흘러갔다. 재희는 스스로를 아끼고 있다는 마음이 들었다. 미국에 오기 전까지는 단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여유였다. 마음과 몸이 나른해졌다. 다음 수업 시작 전까지는 언제든 스튜디오를 이용해도 된다는 강사의 말을 듣고 잠시 요가 스튜디오 매트에서 누워있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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