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th

익숙해졌으면 싶지만, 익숙해지지 않았으면

by 델리만쥬

학과 교수님이 돌아가셨다고 한다.

어제 저녁에, 학과 단톡으로 전달받은 내용이다. 과대표 하다가 물러난 것을, 두 번째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첫 번째는 학생회장을 안 한 덕에 버클리에 갔다올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두 번째는, 어제 이런 부고를 내가 전달하는 입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재작년 5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하이브리드라 대면, 비대면이 섞여 있었는데 당시 나는 수업은 비대면, 행사는 대면이 더 많았던 때였기에 도서관에 자주 갔었다. 어느 월요일 새벽 6시 50분, 엄마의 전화를 받고 , 수업 끝나고 잠깐 쉬어야지 하고 숨 돌리다 카톡을 받고 하염없이 울었다.


할 건 해야지, 하면서 스스로 마음을 추슬렀다. 괜찮아. 별거 없어. 너가 죽은 게 아니잖아. 추모는 조금 후에, 일단 할 걸 하고 해야겠지. 독하게 마음먹었다. 당시 어텐션 모델도 처음 접했던 때라 공부할 거, 과제, 자격증, 코드 짤 거 등등 할 일이야 정말 쌓여 있었거든.


그런데 생각을 비우고 구글 코랩을 켜도 ... 눈물이 났다. 눈물을 간신히 막고 독해야돼! 하는데, 또 눈물이 났다. 정말 하염없이 울면서 수업 후 병원으로 향했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야 가족이지만, 교수님 부고에도 이렇게나 눈물이 날 줄은 몰랐다. 학생회도 그만둔 지 오래됐는데, 사람에 데여서 더 이상 그런 애정이라고 할 만한 감정도 딱히 없는데. 내 착각이었던 걸까. 눈물이 자꾸 난다.


죽음이라는 형태는, 어떻게 보면 사랑의 아주 궁극적인 형태가 아닐까.

누군가 죽었을 때, 어떠한 형태로든 표하게 되는 사랑이 가장 궁극적인, 추상적인 사랑의 구체적인 형태가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엔 시신을 먹음으로써 그 영혼이 자유롭기를 바랐고, 지금은 꽃과 화장을 통해 지도 상엔 없는 곳에서 자유롭기를 바라는 그런 형태의 사랑.


입시와, 부임과, 뭐 그런 것들이 모두 종합된 후에야, 아니 전제된 후에야 가능했던 관계가 교수와 학생이다. '번지점프를 하다'에서는, 이병헌이 그렇게 말한다.

지구다.

이 지구 상 어느 한 곳에, 요만한 바늘 하나를 꽂고, 저 하늘에 밀씨를 또 딱 하나 떨어뜨리는 거야. 그 밀씨가 나풀나풀 떨어져서 그 바늘 위에 꽂힐 확률. 바로 그 계산도 안 되는 기가 막힌 확률로 니들이 지금 이곳, 지구 상의 그 하고 많은 나라 중에서도 대한민국, 그 중에서도 서울, 서울 안에서도 세현고등학교, 그중에서도 2학년, 그거로도 모자라서 5반에서 만난 거다.


그래, 그 중에서도 6수시든 정시든 마치고, 학교를 선택하고, 학과를 선택해서, 만나게 된 관계라는 거겠지. 그래서 눈물이 나던 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그런다. 전과, 편입, 반수 등등을 하는 순간 소멸되는 관계인데 뭐 그리 유난이냐고.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관계가 형성되기 전까지는 유지되는 관계라서,

그리고 사람이란 게 항상 합리적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서,

따뜻함 하나에도 울고 그 하나로 관계가 각별해지는 게 사람이라서, 라고밖엔 답이 안 된다.


쓰다 보니 마음이 조금 진정된다. 대전이 빈소라는데, 거기까진 여건상 가지 못해 국화를 샀다.

조심스럽게 교수님 연구실 바로 앞에 두고 왔다. 이미 이삿짐 센터에서 바구니 등을 한가득 갖다놨더라. 사람의 흔적을 지우기까진 참 오래 걸릴 텐데, 물품은 참 빠르게 치워지겠지. 국화 한 송이는 안 치워주셨으면.


마지막 형태의 사랑이 죽음이었다면, 그 표현의 마지막 형태는, 여기서는 국화가 될 테니 말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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