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엔, AI가 흉내내지 못할 인간 간의 시너지라는 게 있었다
회사든 학생회든 어느 조직이 되었든, 처음 들어갈 때는 비슷하다.
다들 열정적이고, 잘 부탁드린다 하고, 다들 능력이 있고, 다들 나보다 더 잘하는 것만 같다. 그래서 안심하고 기대를 한다.
‘여긴 괜찮겠구나.’
그런데 몇 달이 지나면, 설명하기 어려운 공기가 생긴다. 딱히 큰 갈등은 없는데 묘하게 피곤하다.
회의는 부드럽게 끝났고 너무 무난해서 더 이상한 흐름이 생긴다. 누구 하나 나쁜 사람은 없는데, 이상하게 자주 지친다.
나는 이게 너무 이상했다.
좋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왜 어딘가 불편할까.
이건 지금 회사가 아닌, 두 번째 인턴을 했던 곳에서의 일이다.
회의는 늘 차분했다. 서로 말을 끊지 않았고, 예의도 지켰다. AI 모델이 쏟아졌던 때인 만큼, 아이디어도 적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이상적인 회의였다.
그런데 늘 마지막엔 이런 말이 붙었다.
“그럼 이건 조금 더 생각해보고 다시 이야기하죠.”
처음엔 신중함이고, 또 결정되지 않은 사항으로 인해 결정이 딜레이되는 것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다음’은 잘 오지 않았다. 결정은 반복적으로 미뤄졌고, 실행은 흐려졌고, 누군가는 조용히 그 일을 떠안았다.
정기 회의는 또 열렸다.
아무도 무례하지 않았고, 아무도 무책임해 보이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일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때 처음 깨달았다 - 이건 개인의 성향 문제가 아니다. 조직이 결정을 내리는 구조가 없었던 거다.
누가 최종 결정권자인지 명확하지 않았고
책임의 범위가 분리되어 있지 않았으며
합의와 결정을 구분하지 못했다
그래서 모든 말은 존중받았지만, 그 무엇도 방향이 되지 못했다. 너무 부드러워서 결단력이 없었던 것.
이때 깨달았다. 좋은 사람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조직에는 결정이 만들어지는 경로가 있어야 한다. 단, 이 경로는 단독 결정 및 그 결과에 대한 통보가 아니어야 한다. 합의는 과정이고, 결정은 행위다.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면 회의는 계속되지만 실행은 지연되고 일은 굴러가지 않는다.
나는 내가 속했던 조직들 중 그 어느 조직도 무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다. 오히려 다들 너무 배려심이 많았고 배울 점 많은 분들이었다. 하지만 배려가 방향을 대신할 수는 없다.
다른 조직에서는 전혀 다른 장면을 봤다.
이번엔 회의가 짧았다. 리더는 빠르게 결론을 냈고, 방향은 명확했다.
겉으로 보면 상당히 실행력 좋고 이상적이었다. 그런데 실행 단계에서 문제가 생겼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등장했을 때 리더는 관련 task를 나에게 일임하면서,"알아서 조율해"달라고 했다.
워낙 바쁘기도 하고, 할 일이 명확했기에 그땐 그 말이 무책임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나에 대한 믿음처럼 들렸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권한은 위에 있고, 책임은 아래에 남는 구조였다. 결정을 위에서 했지만,
수정과 설득, 감정 노동은 실행자가 감당해야 했던 구조.
결과가 좋으면 조직의 성과가 되었고, 결과가 나쁘면 실무자의 판단 미스가 되었다.
그때 알았다.빠른 결정이 항상 좋은 조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책임이 어디에 남는지가 더 중요하다.
나는 두 조직에서의 경험을 비교하며 이런 생각을 했다.
한 곳은 결정을 미루는 구조였고
한 곳은 책임을 흘리는 구조였다
둘 다 개개인을 뜯어본다면, 모두 좋은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지만,구조가 달랐다. 그리고 그 구조는
구성원의 태도를 조금씩 바꿨다. 결정을 미루는 조직에서는 사람들이 점점 말을 줄였다. 어차피 확정되지 않으니까.
반면, 책임이 아래로 흐르는 조직에서는 사람들이 방어적으로 변했다. 괜히 나섰다가 떠안을 수도 있고,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이건 누가 나빠서가 아니라, 조직이 그렇게 학습시키고 있었다.
이 두 공간을 오가며 나는 조금 달라졌다. 회의에서 말을 꺼낼 때 ‘이게 진짜 결정으로 이어질까?’를 먼저 계산하게 되었고, 새로운 일을 맡을 때 ‘권한은 어디까지인가’를 확인하게 되었다.
조심성이 늘어난 건지, 소극적으로 변한 건지 잘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나는 더 이상 ‘사람이 좋으니까 괜찮겠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여기선 어떻게 결정이 만들어지는지, 그리고 그 전달이 어떻게 되는지
책임은 어디에서 멈추는지, 최종 책임을 지는 사람이 누구인지
실패와 리스크 감당을 누가 어떻게 하는지. 이런 것들을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도 묻는다.
나는 지금 구조를 탓하며 뒤로 빠지는 사람인가, 아니면 구조를 이해하고 움직이려는 사람인가.
나는 그래서 이제 사람을 평가하기 전에 구조를 본다. 그리고 그 구조 안에서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할지 고민한다. 아직 정답은 없다. 다만 확실한 건, 좋은 사람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다음 글에서는 “말이 많은 조직과, 말이 통하는 조직”의 차이에 대해 써보려 한다.
회의는 많은데, 왜 어떤 곳에서는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는지,를 메인으로 말이다.